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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십상 8. 뻘짐 지고 장딴지에 퍼런 심줄 꿈틀, 역동적인 방언공사
소태산 십상 8. 뻘짐 지고 장딴지에 퍼런 심줄 꿈틀, 역동적인 방언공사
  • 박청천 교무
  • 승인 2017.08.18
  • 호수 1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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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공사 1918.5.13~1919.4.26 …간척답 준공인가 1930.7.17
천정리 김덕일…자진해 빚 내주고 방언답 횡령하려다 실패
재비로 콘크리트 수문 만들고, 이만갑·이공주가 부채 탕감

▲ 방언공사 기념비 제명바위. 조합장을 비롯하여 8인 조합원은 나이순으로 기명되었다.
심독희자부(心獨喜自負)와 칼노래

대종사 대각하고 그 충만한 기쁨을 '심독희자부'라 하였다. 혼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탄식하였다. "소원성취 이 내 일을 어디 가서 의논하며 어느 사람 알아볼까. 쓸 곳이 전혀 없어 이리 가도 통곡 저리 가도 통곡 이 울음을 어찌하여 그만 둘꼬"(<탄식가>)

천하 만국만민 다 구제하고 일체 생령을 다 제도하겠다는 서원, 어떻게 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이 기쁨을 함께 할꼬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심독희자부의 부(負)는 칼(刀) 아래 돈(貝)이다. 아무리 부자면 뭐하는가 목 위에 시퍼런 칼날인데. "나 혼자만 좋으믄 먼 재민겨. 세상과 함께 좋아야제." 자부의식(自負意識)은 제 잘났다는 자만감이 아니라 세상사람과 더불어 살겠다는 책임감 내지 부담감이어야 한다. 성불하면 그 도력만큼 제중의식이 더 강해지는 법이다.

앞뒤 콱 막혀 자기만 옳다는 주자학을 맹신한 조선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한울 도를 득도한 최수운은 '사람이 한울임(人乃天)'을 천명하였으나 강고한 유생들은 그를 좌도난정(左道亂正; 西學)이라는 죄목으로 규정하여 그의 최후는 회자수의 칼날 아래 있었다. 망나니 칼 아래 길게 목을 내놓은 수운은 동학도들과 칼노래(劍訣)를 부르며 최후를 마쳤다.

"때여 때여 이 내 때여, 다시 못 올 답답한 때로다/ 만세의 장부로서 5만년의 때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소매 없는 장삼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넌짓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이 한 몸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때여 때여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있네/ 만고명장 어디 있나 대장부 앞에 장사가 없나니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 내 신명 좋을시고."

대장부가 뜻을 펴고 살 수 없는 앞뒤 꽉 막힌 답답한 시절을 수운은 망나니와 동학도들과 일체가 되어 용천검으로 끊어내었다.

세상이 바꿔야 한다. 서슬 퍼런 심정으로 일심합력 칼을 휘두른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다 때가 있고 거기에 맞는 연장을 써야 한다. 그 용천검을 대종사는 <최초법어> 첫 대목에서 시대정신(時代精神) 즉 시대를 따라 학문을 준비하라 강조하였다. 갑오동학란 때 팔도 농민군들이 다 들고 일어섰으나 일본놈들 좋은 일만 시키고 말았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청국과 아라사(러시아)를 물리치고 조선반도를 집어삼켰다.

장보러 다니며 주막에서 세상정보 수집

대종사는 당신의 전생이 수운이라 했다. 수운선생이 대구감영 관덕정 마당에서 참형당하고 27년만에 다시 왔다. 대종사 대각하고 장보러 다니기 시작했다.(수운은 득도 전 10년간 백목 행상을 했다) 세상을 관찰하려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로 가야 한다. 인심도 알고 물가의 추이도 알아야 한다. 오일과 열흘이 법성포장이고 그 다음날이 구미수미장이다. 구수미 독바우 주막과 법성포 나씨 객주에 드나들며 정보를 수집했다.

서해안 일대에 일본농장주들의 간척사업이 한창이었다. 구수미 독바우 주막에서 보면 갯물 건너 법성포 목냉기와 자갈금 두 야산 사이에 한창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불과 600m 좁은 물목을 막으면 20리에 걸친 언답 개발로 만석꾼은 따 논 당상이었다.(그 방조제의 길이가 우리 제1차방언답 언둑 길이와 똑같다)

조선총독부의 지원하에 금융조합의 융자로 일본농장주의 간척사업이 진행되었다. 반만년 대대로 이 땅에 명을 붙이고 산 조선인은 그들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처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대로 맥 놓고 당할 수만 없다. 우리 힘으로 방언공사를 하자. 대종사, 방언조합을 설립하고 조합장이 되었다.

▲ 길룡리 양처 방언답 정관평 개념도.
조합장 전 재산 조합에 투자

방언조합은 대종사가 솔선수범을 보이며 시작되었다. 구호동 집과 밭은 물론이고 사모님이 당년에 농사지은 담뱃잎을 말려 엮어놓은 시초갓과 놋그릇, 놋요강 등 값나갈만한 살림도구까지 모두 방매하여 500여냥을 만들었다. 100냥으로 강변주막을 사서 이사 가고 400냥을 조합금으로 출자하였다. 강변주막도 방언조합관리소 역할을 하였으니 사실상 전 재산을 다 내놓은 셈이다. 모름지기 지도인은 이렇게 지행일치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 <최초법어>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읍내 무령재 너머 군도리 사는 막내동생이 장돌뱅이라 시세를 잘 알았다. 석유와 숯이 하루가 다르게 금이 올라갔다. 1차대전이 유럽에서 일어났는데 구라파가 서로 경쟁하여 중국을 못 먹어서 한이었다. 청나라가 큰소리만 뻥뻥쳤지 종이호랑이였다. 일본이 청나라 산뚱반도를 차지하고(租借地) 있는 독일을 공략하기 위해 함대를 출동시켜 대포를 쏘고 화력이 무한정 필요할 때였다. 대종사는 석유의 용도를 몰라 숯 장사를 했다. 의붓형 김정집이 구수산 큰골에서 숯을 굽고 이복형 군옥이 달구지로 숯포를 강변나루에 실어왔다. 막내 한석이 물건 팔고 거간붙이는데 이력이 났다. 청나라에 독일과 일본이 전쟁으로 1년만에 숯값이 열배로 폭등하였다.

조합장은 수소문하였다. 한 마지기라도 갯막이에 성공했다는 사람이면 찾아가 그 비방을 물었다. 썰물 시간이 짧아 한꺼번에 인력을 동원해야 된다는 것, 외부의 흙과 돌을 이용할 여력이 못되니 자체 갯땅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는데, 갯땅이 무른가 찰진가가 변수라는 것이다. 길룡리 갯벌이 대강 25정보가 되는데 수심이 얕은 10정보만 언답으로 막을 작정했다. 썰물이 되면 조합장은 아예 갯벌에서 살았다. 바닥의 찰진 뻘을 가래로 퍼 모아놓고 밀물이 들어와도 유실되지 않고 얼마나 단단하게 유지되는가를 관찰했다. 도통했다는 이가 온몸에 뻘칠갑을 하고 궁리하는 것을 보고 동네사람들은 미친 사람으로 보았다.

▲ 제1차 방언공사 언답(1943).
어이, 자네씨가 최고여! 장산리 장정 격려

9인 조합원의 근검절약과 저축으로 시작한 방언공사는 많을 때 50명의 인부를 쓰기도 하였다. 장산리에서 온 장정은 일본농장 간척공사에 돈 벌러 갔다가 왜놈들 짓거리에 배알이 틀려 길룡리 갯막이에 온 자로 언답공사 경험도 있고 힘이 장사였다. 제 힘을 믿고 감독의 말을 듣지 않자 대종사가 장정의 지게다리를 쳐 혼절시켰다는 위압적인 일화가 전하는데 그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조합장은 작대기를 짚고 둑에 서서 감독만 하지 않았다. 장정의 의기를 높이 싸 함께 뻘짐을 지고 동행하며 "어이, 자네씨가 최고여" 막걸리 사발을 권하며 기운을 북돋아 일등공신 만드는 감화력도 있다. 보통 일꾼은 찰진 뻘덩이 세 개 지고도 땀을 뻘뻘 싸는데 장정은 다섯 덩이, 기분이 내키면 열 덩이도 졌다.

가래로 뻘을 두부모 뜨듯이 퍼 바작(발채)에 지고 조합장이 앞장서서 뻘에 푹푹 빠지며 장단지에 퍼런 심줄이 돋는 역동적인 모습, 이게 방언공사 당시 실다운 당신님 면모이다. 도통하여 민중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하여 26,000평 간척답을 확보했다. 꽁보리밥, 조밥만 먹던 길룡리가 삼시세끼 쌀밥을 먹게 되었으니 이런 경사가 없었다. 〈불교시보〉에 당신님을 '농성(農聖)'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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