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어느 단체나 최고지도자에겐 최고의 영광 이면에 최고의 고난도 뒤따른다. 최고지도자는 어떠한 찬송과 비난 속에서도 한결같이 과업을 잘 이행해야 하지만, 그럴 능력이 있다고 그 자리가 누구에게나 오는 건 아니다. 객관적인 통치력이 최고인 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며, 최고 법력자라고 종법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최고지도자는 하늘이 낸다는데, 그 하늘이란 게 인연이다. 그 자리와 인연 있는 사람은 한차례 건너서라도 돌아온다. 사람들은 운이라 말하지만 정확히는 인연과다.

인사나 선거가 끝나면 더 적임자를 두고 왜 그가 그 자리에 앉는지 이해 안 될 때가 있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고 못 쓰고의 문제 이전에 묘한 이치가 먼저 작동함을 우리는 안다. 그 일과 인연이 있고, 그 자리를 통해 어떤 것을 겪어야 할 필연으로 그가 거기 있다. 잘하고 못하고는 다음 일이다.

어느 위치에서 무슨 직무를 맡든, 모든 직무는 보은의 방편이고 인연이지 더 좋고 나쁨도, 높낮이의 문제도 아니다. 우주가 한 몸 법신이며, 우주만물은 각각 다른 역할을 맡아 법신으로서의 한 몸을 운영한다. 손이, 심장이, 뇌가, 눈이 각각 그 역할이 다를 뿐 무엇이 더 귀하거나 하찮지 않다. 모든 이의 직무는 다 법신인 내 몸을 위해 일을 해주는 것이라 고맙고 소중하다. 종법사 역시 그 보은의 한 방편이며 일터다. 누군가는 맡아줘야 할 그 절대 고독의 업무를 책임져주는 은혜롭고 감사한 역할이다.

종법사 직무는 아무리 말세라도 항마위 이상이라야 자격이 있다. 항마위는 정사(正師), 바른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관문이라 그렇다. 일체의 의사결정이나 법을 설할 때, 대소유무를 근본으로 시비이해를 판단하여 구성원들을 바르게 인도할 지도자는, 출중한 인격자이기만 해서는 안되며, 적어도 항마 이상 도인이라야 그 자격이 있다.

당대 종법사보다 법력 높은 도인이 나는 것은 경사스럽고 자연스런 일이다. 지난 시절, 종법사보다 법력 높은 스승님들이 오체투지로 종법사를 공경 예우하는 모습을 보아온 우리는 행운 공동체의 일원이다. 종법사보다 법력 높은 도인이 날 때 법위사정은 대중의 공의를 얻어서 하라시는데, 여기에서 공의를 얻을 대중이란 법위승급에 관련된 업무를 맡은 분들을 일컫는다.

어느 교단이나 창립기에는 깨달음의 혜안을 가진 교조의 절대적 카리스마로 교단이 움직이지만, 교조가 떠난 이후에는 대중의 공의가 의사결정의 안전장치가 된다. 공의가 완벽하거나 최선이어서가 아니다. 멀리 앞을 보는 이에겐 공의의 결과가 훨씬 수준 낮은 것일 수 있다. 앓느니 죽는다고, 사실 양에 차지도 않고 복잡하게만 하느니 혼자서 빠르고 훌륭한 결과를 내는 일이 수없이 많다.

공의를 거치다보면 느리고 복잡하지만, 그래야 뒤탈이 없고, 일이 생겨도 함께 책임지고 이해하게 되며 구성원들의 소외감을 덜어준다. 공의를 거치며 소통하는 일은, 더디더라도 안전하고 함께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아무리 말세라도 항마 이상이라야 종법사 자격이 있나니, 오죽 가난하고 불행한 종교가가 항마도 안 된 분을 최고지도자로 모시게 되는 상황이리라.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