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육신·물질 다바친 생애

남편 서중안과 함께 3천여 평의 기지 대금과 건축비 6백여원을 희사해 익산총부 건설에 앞장 선 칠타원 정세월 정사.

원기9년(1924)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도록까지 실질적인 희사만행,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가 봉래정사를 하산하게 되는 역사적 역할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일생을 이경진 교무가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그는 "칠타원 정세월 정사는 삶에 대한 고단함 속에서도 무엇보다 제일 큰 기쁨이 대종사와 만남이었다"며 서중안 선생과 결혼한 이후 바뀐 칠타원 정사의 삶을 서술했다. 칠타원 정사가 부군 서중안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뵙고 제자가 된 것은 원기8년(1923) 변산 봉래정사에서였다. 이때 소태산은 칠타원 정사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지중한 인연이 될 것임을 밝힌 대목이 나온다. "내가 오늘 어디를 좀 다녀오려고 행장을 차리던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내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멈추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렇게 조그마한 사람이 오는군. 하지만 영은 매우 크구나. 내가 장차 큰 회상을 열어 고해 창생을 다 제도하려 하니 그 대도 새 회상의 큰 주인이 되기 바라노라. 그대에게 세월이란 법명을 주노니 인간 세상을 밝혀 비춰주는 달 같은 인물이 되라."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칠타원 정사에게 뜻하지 않는 변고가 생긴다. 부군이 우연히 발병해 백방으로 치료에 힘을 써 보았지만 원기15년(1930) 49세에 애석하게 열반을 맞게 된다. 칠타원 정사는 말할 수 없는 큰 슬픔이었으나 이듬해 원기17년(1932) 전무출신으로 출가해 총부 공급주무·내감원·순교·중앙수양원 주무·감원 등 21년간 봉직한다. 또한 원기20년 동선에서는 소태산으로부터 초견성 인가를 받기도 했다. 원기30년에 칠타원이란 법호를 받고 여자수위단을 처음 조직할 때 곤방 단원이 됐다.

이 교무는 "칠타원 정세월 정사는 어릴적부터 아랫사람을 지극히 생각하는 게 남달랐다"며 "이러한 성품은 훗날 교단의 주인으로, 알뜰한 공심가로 이끌게 된다"고 말했다. 칠타원 정사는 1896년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인홍리에서 부친 정문명과 모친 이명인화의 10남매 중 5녀로 태어나 16세에 서중안과 결혼했다. 천성이 활달하고 근실해 부모를 잘 모셨으며, 하솔의 도가 분명해 가족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이러한 성품은 훗날 출가해 감원으로서 총부 살림을 맡을 때에는 활달한 성격과 치밀한 보살핌으로 대종사의 수족 같은 역할을 했고, 후진들에겐 어머니 같은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그는 "칠타원 정사의 남다른 하솔의 덕은 전재동포구호사업에서 크게 발휘됐다"며 "구호활동에서 급식을 총지휘하며 담당했는데, 하루 평균 20가마씩 모두 890가마니 밥을 지어날랐다"고 말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일본 만주 중국 등지로 징용을 나갔던 전재동포들이 물밀 듯이 돌아왔는데, 전재동포구호활동은 9월4일 이리역전과 9월10일 서울역전에 '전재동포구호소'를 설치하면서 시작한다. 이리에서는 13개월 반, 서울에서는 6개월 반 동안 귀환 동포들에게 식사·의복 공급, 숙소 안내, 무임승차권 제공, 응급 치료와 분만 보조, 그리고 사망자에 대한 치상 등을 행했다. 대부분 구호물자는 미군이 제공했지만, 교도들의 성금과 성품, 시민들로부터 모집 및 기탁에 의지했다. 칠타원 정사가 있던 이리후생원은 1946년 10월26일까지 활동했다. 당국에서 지원하고 교단에서 후원한 식량은 890가마였는데 이 때 쉴틈없이 오직 봉공심으로 끝까지 일을 해냈던 것이다.

칠타원 정사는 제1대 성업봉찬대회를 마친 후 원기39년(1954) 6월부터 중앙수양원에 입원하여 수양에 힘쓰다가 원기62년(1977) 열반을 얼마 앞두고 "구월보름경(음력)에 가야겠다"고 미리 날을 받아 두더니 과연 음력 9월13일(10월25일)에 82세를 일기로 거연히 열반했다.

그는 "칠타원 정사는 대종사님 초창 회상 때부터 정신·육신·물질로 아낌없이 다 바치셨으면서도 후진 사랑과 사회 봉사 등 출가인으로서 인생을 크게 살다가신 분이다"며 칠타원 정사의 인생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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