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정진심과 공부심이 막 승할 때, 이런 마음이 뒤로 물러나지 않고 쭉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리만 되면 성불하기 일도 아닐텐데. 지금의 마음이나 좋은 상태가 변치 않으면 좋겠다 싶지만, 이 마음이나 상황이 변치 않고 유지됨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좋은 것만이 아니라 원치 않는 상황이나 고통, 힘든 기억까지도 역시 지속될 터이니 일체가 변하고 잊혀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천하의 진리가 어느 것 하나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음'이 법신불의 자비요 무량은이다. 진리는 불생불멸한 가운데 음양의 기운이 있어, 성주괴공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끝없이 오간다. 자신이나 가족, 가까운 지인들과 연관된 경계들, 심신을 건드는 무언가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 천만 경계 속에서도 공부심이나 삼대력이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불퇴전은 출가위에 올라야 가능하다. 허나 의사자격을 얻었다고 다 명의가 되는 것은 아니듯, 출가위 자체가 곧 불퇴전도 아니다. 서원과 신분의성으로 임상과 치료를 수없이 하다보면 어떤 병도 다 고칠수 있는 명의가 되어간다. 단지 직업으로서의 의사를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제생의세를 목표하는 의사라야 참 명의다. 나 혼자 해탈하여 안분하고자 불퇴전위에 오르기를 목표한다면 불퇴전의 이름표도 붙일 수 없다. 갈애와 욕망으로 불퇴전을 꿈꾸면 헛공부다. 만중생이 사방에서 건져주 살려주 울부짖는데, 사생일신의 출가위 불보살이라면 안분과 해탈을 위해 불퇴전위에 오르리라 작정하지 않는다.

힘을 다 갖춰 불퇴전위에 오른 후 중생제도를 하리라 하지 말라. 정상만을 바라보며 언제쯤에나 저기 오를꼬 하는 마음으로 등산하면 걸음걸음이 힘겹고 공부가 재미없다. 만나는 풍경 일체를 다 정상과 하나로 알고 가면 걸음걸음이 가볍고 은혜롭다. 과정 일체가 정상을 여의지 않음을 알고 기쁘게 가다보면 어느새 정상이다. 평생 먹구름만 쳐다보고 걷어내는 일에 안간힘 쓰지 말고 태양빛만 여여하게 비추면 될 일이다.

불퇴전위는 어떤 경계라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지도, 경계로 여기지도 않는다. 마음, 환경, 몸으로 만나는 모든 경계는 중생제도의 만능을 기르는 과정, 임상이며 자료로 본다. 경계와 싸워 이겨 법이 백전백승하며, 심력을 써서 경계에 부동심이 되는 것은 항마위 경지며, 경계 속에 마음고삐를 놓아도 동하지 않는 것이 불퇴전의 출가위다. 체급이 약하면 작은 경계도 크게 느껴지고 고통스럽지만 체급이 워낙 크면 어떤 펀치에도 흔들리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경계는 똑같이 와도 삼대력이 뭉치고 뭉치게 되면 저절로 불퇴전으로 판이 바뀐다. 불퇴전은 서원과 신분의성으로 끝없이 공부하고 제도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도달하는 것이지 따로 추구하여 얻는 경지가 아니다. 한 경계, 티끌 하나가 다 법신이라, 지금 겪는 과정, 천만경계가 다 법계로 변화하여 걸리고 막힘이 없다. 순역간 어떤 경계도 은혜 아님이 없으며, 번뇌가 곧 보리니, 이것이 이른바 나아갈 뿐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이다. 이루려 하지 않아야 비로소 온전히 이뤄지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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