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기62년에 당시 이리·역전보화당의 대표였던 윤산 김윤중 종사의 인연으로 역전보화당에 취업하게 됐다.

고향은 영광군 염산이었는데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였다. 그때는 원불교라는 종교도 몰랐고, 더구나 역전보화당이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취업 면접이라 무척 긴장을 했다. 월요일날 인사드리는 날이었는데 당시 교통도 요즘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일요일날 익산에 올라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기62년 2월8일 면접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아마도 같은 동향이셨던 김윤중 종사의 인연이라서 그런지 많이 믿어주셨던 것 같다.

역전보화당 사장은 훈산 정경훈 교무였는데 면접이 일찍 끝나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나에게 영화나 한편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현재 상업은행자리에 제일극장이 자리했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밖으로 나왔지만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그냥 영광 염산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참 숫기가 없는 시골 학생이었다. 어릴때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집과 마을에서만 생활했던 터라 타도시는 정말 낯설었다. 더욱이 익산은 처음 와 본곳이었고, '집에나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발길이 저절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당시 영광에서 익산으로 올라올 때도 그랬지만, 다시 영광으로 내려갈 때도 바로가는 직행버스가 없던 시절이었다. 중간에 광주를 거쳐가야 했다. 광주로 내려가는데 호남터널을 지날 때였다. 지나자마자 내가 탄 버스가 대형트럭에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과를 실은 트럭이었는데 사과가 여기저기 떨어졌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버스는 더 이상 운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버스 기사는 "다른 버스를 불렀으니까 광주로 갈 사람은 광주 버스 타고 가고, 익산으로 갈 사람은 익산 버스 타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면서도 한 가지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역전보화당은 나에게 정말 인연이 있는 곳이구나.' 나는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고, 익산으로 올라가는 버스를 탔다.

당시 역전보화당은 이리보화당의 지점으로 시내의 중앙동에 위치해 있었다. 처음 입사한 나에게 주어진 일은 녹각을 큰 망치로 깨는 일이었다. 그때는 녹각을 썰지 않고 큰 망치로 내리쳐서 깨는 시절이었다. 나는 시골에 살아서 이런 일을 하는데 자신감이 있었다. 김양덕 씨는 녹각을 쪼갤 방향으로 도끼를 대고 있으면 나는 큰 망치로 내리쳤다. 젊은 학생이 처음 하는 일이었지만 잘 해서 그런지 모두 격려해주셨다.

하지만 당시에 이렇다 할 연장기구가 발달돼 있지 않아 사실은 매우 고된 일이었다. 녹각을 내리칠 때마다 얼굴과 머리로 튀다보니 상처투성이가 되곤 했다. 하루종일 힘든 녹각 작업을 하고나면 퇴근 전에는 한약재를 운반하는 작업까지 마쳐야 했다. 1층에서 3층으로 말이다. 물론 당시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녹각 치는 일에 이미 몸은 지치고 배고팠는데 100근짜리 마대에 담긴 한약재들을 어깨에 메고 수십 번을 올라 다녔다. 보화당 일이 워낙 많아 일요일만 쉬고 매일 저녁 9시까지 작업을 했다. 손바닥에 옹이가 박히고 물집이 터져 상처가 나을 날이 없었지만, 조금씩 적응하다보니 이제 약을 절단하는 작두질도 서서히 시작하게 됐다.

당시 이리·역전 보화당 모두 장사가 무척 잘 되었을 때다. 내가 근무했던 보화당 식구만 해도 17명이었다. 이리보화당은 20명 가까이 됐다. 당시 대보탕, 육미지황탕 등이 많이 나갔다. 다음날 오전에 손님이 많이 몰려왔기 때문에 저녁에는 10~20제를 미리 지어놔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약제를 전부 작두로 썰어 놓곤 했다.

/이리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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