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효는 단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막연한 관념을 넘어서고 있음을 인간은 경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아함경>에서는 빈천한 집안에 태어나는 원인에 대해, 하나는 부모와 어른 그리고 스승에게 효순(孝順)하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나보다 나은 이를 받들어 섬기지 않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 그런데 가난과 효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공존공영의 인덕 경영으로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까지 떠받들어지는 마츠시타 고노스케는 평소에 다음의 세 가지를 마음에 새기며 실천했다고 한다. 첫째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서 늘 섭생하는 것을 잊지 않고 실천했다. 둘째는 어릴 때 배우지 못해 늘 배우는 자세로 살았다. 셋째는 어릴 때 부모와 형제들을 잃어서 모든 어른을 부모님 모시듯 했다. 자신의 육체, 학문, 혈육의 가난을 오히려 마음공부로써 극복한 이 사실을 통해 보더라도 부처님의 설법에 깊은 뜻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효의 정신이 기업가의 정신적 기반이 된 것에서 대종사님이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충신을 효자의 문에서 구한다"라는 점을 강조한 뜻이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근본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의 전생담 중 하나는, 전생에 인욕태자로서 부왕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뼈를 끊고 골수를 내며 두 눈을 도려내어 약을 만들어 바쳤던 인연으로 현생에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효가 성불의 인임을 알 수 있다.

효도는 몸을 봉양하는 신효,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심효, 세상에 나아가 부모의 뜻을 받들어 제중사업을 하는 대효가 있다. 여기에 오희선 교무가 주장하는 부모의 사후까지 책임지려는 천효(天孝)를 더한다면 효의 길은 완성된다.

그런데 부모은의 강령인 무자력자 보호의 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심지관경>에서는 불성의 평등성을 통해 부모와 중생의 은혜를 하나로 보고 있다. 부처님은 "중생의 은혜라는 것은 곧 처음 시작된 곳이 없어서 일체 중생이 5도(道)에 돌고 돌아 백천 겁을 지내는 동안 여러 번 태어나는 가운데 서로 부모가 되었다. 서로 부모가 되었던 까닭에 일체의 남자는 곧 자애한 아버지요, 일체의 여자는 곧 자비한 어머니이니, 옛날에 태어났을 때마다 큰 은혜가 있었으므로 현재 부모의 은혜와 평등하여 차별됨이 없는 것이다"라고 설한다. 그리고 중생끼리 원수가 되는 것은 무명에 가려 이러한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한다.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는 이 깊은 관계야말로 모든 중생의 근본적인 관계이며,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진리인 것이다. 왜 타자를 나와 일치시켜 보아야 하는가하는 타자윤리학의 원리를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자력자 보호는 곧 영생을 통해 나의 인연을 가꾸는 행위이다. 나의 복전이 되므로 그 기회를 얻게 됨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예로부터 가장 어려운 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덕목이다. 모든 성현은 가장 낮은 곳의 사람을 구제할 것을 가르쳤다. 심지어 불가에서는 성불의 종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일천제(一闡提)라는 존재를 오히려 부처의 화현으로 보고, 자비의 손길을 내밀었다. 부모은은 이 얼마나 보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종교정신을 보여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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