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도언 교도/해운대교당
튼실한 씨앗이라야 자갈밭에서도 싹 틔워
국민과 정부, 서로 신뢰로 독일 통일 이룩

교당 화단은 작금 코스모스 마가렛트 백일홍이 흐드러졌다. 엊그제 꽃망울로 몽글몽글 달려있더니 추분(秋分)을 맞아 너도나도 뽐내듯 경쟁하듯 활짝 피어났다. 김경은 교무가 늦봄에 뿌렸던 보잘 것 없던 작은 씨앗들에서 꽃망울이 터졌다. 여리디여린 씨앗이 무겁고 거친 땅거죽의 무게를 밀치고 지상으로 오른 영광의 선물이다. 꽃은 꽃봉오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씨앗이 창조했다. 그리고 씨앗은 불굴의 그 정신을 후손에게 남길 것이다.

꽃은 다 아름답다. 붓꽃, 할미꽃, 제비꽃 구분 없이 곱다. 꽃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여름 한 철 하얀 꽃을 피우는 치자꽃나무가 있다. 꽃봉오리만 솟아도 벌써 향기를 내뿜는 꽃나무다. 꽃이 활짝 피면 100m 앞에서도 향기를 진하게 맡을 수 있다. 그 꽃 앞에 서면 절로 심호흡이 나온다. 향기에 반한 사람들은 감탄과 환희에 몸을 떨기도 한다.

꽃을 보려면 씨앗을 심어야 한다. 꽃을 빨리 보고 싶다고 꽃봉오리를 땅에 심는 것은 어리석고 멍청한 짓이다. 이건 꽃을 피우는 작업이 아니다. 꽃을 죽이고 종자마저 없애버리는 우둔이요 패악이다. 그렇게 해선 결코 꽃을 만날 수 없다. 오늘의 희망을 꺾는 서투름이며 내일의 결실을 결딴내는 몰지각이다.

꽃을 제대로 키우려면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한다. 속이 옹골차지 않거나 가벼운 씨앗은 우량한 새싹으로 자라지 못한다. 무른 씨앗은 질병에 빨리 노출되고 쉽게 부패한다. 씨앗을 잘 말리고 정성으로 관리해야 찬란한 꽃을 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은 동서독으로 나뉘었고 경제는 결딴났다.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독을 차지했고 러시아(당시 소련)는 동독을 가졌다. 참담했던 경제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자 서독 빌리브란트정부는 1969년 동방정책을 세워 통일꽃을 피우기 위한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조치로 동독을 여행하는 서독국민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동독에서 그 돈을 다 사용하도록 했다. 두 번째로 성탄절, 부활절에 동독친지에게 선물을 보내도록 권유했고 지출금에 대한 세금혜택을 주었다.

서독국민의 동독방문이 잦아지자 불편한 여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서독국민의 절반이 동독친지에게 포섭되어 간첩이 되었다는 보도가 TV와 신문에서 연일 터져 나왔다. 언론의 안보장사가 시작되었다. 서독정부는 그러나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걸음씩 뚜벅뚜벅 나아갔다. 서독정부는 통일 전인 1971~1989년까지 동독정부에 매년 33억불(약 3조7천억원)을 퍼주었다. 서독정부와 국민들은 언론의 보도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서로를 신뢰했다. 국민들은 정부의 평화통일정책을, 정부는 국민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을 굳게 믿었다.

서독정부의 화해정책이 철석같다는 것을 눈치 챈 동독정부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서독정부가 동서독을 잇는 고속도로 3개를 건설해 주겠다고 동독정부에 제안했다. 가난 때문에 도로사정이 빈약했던 동독은 이 제안을 쌍수들어 환영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동독땅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면 동의해 주겠다고 떼썼다. 브란트정부는 논리적 반박을 내놓는 대신 순순히 동독정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공산주의국가는 정상적 대화로 풀기 힘든 상대임을 알아야 한다"고 브란트는 말했다. 어른이 아이가 말 잘 듣는다며 빵을 주었다가 말 잘 안 듣는다고 다시 뺏는 것은 아이의 기질을 모르는 어른의 아집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고 기다리며 보살펴 주는 것이 어른의 진짜 본분이라는 것이다. 동서독을 잇는 고속도로 건설은 서독국민의 동독왕래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서독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자유주의가 동독사회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1990년 가을, 통일은 그렇게 왔다. 보편적 상식적 은혜적 가치를 담은 통일씨앗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탐스런 꽃을 피우려면 건강한 씨앗이 필요하다. 이런 씨앗이라야 마구잡이로 증식하는 암세포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씨앗이 자라는 땅 어디에도 돌멩이는 있고, 하늘 어디에도 구름은 있다. 튼실한 씨앗을 뿌려야 자갈밭에서도 흐린 날에도 가지가 뻗고 잎이 달리고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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