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은 교무

원불교와 불교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서품 2장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만한 연원을 밝히고 있다. 소태산은 스스로 구도하고 깨달음을 얻었지만 깨달음의 연원을 석가모니 부처에게 정한다고 했다. 대각을 이룬 후 스스로 알아 낸 진리의 발견에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소태산은 유교와 불교, 선교, 동학, 기독교의 경전을 열람한 후 특히 〈금강경〉의 진리에 가장 큰 매력을 느끼게 된다. 또한 구도과정과 도를 이룬 과정 그리고 깨달음의 내용에 대한 큰 공감을 하고 석가모니를 연원불로 결정하게 된다. 소태산의 연원불에 대한 결정은 새 회상을 여는 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방향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 분의 만남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수없이 많은 만남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이웃과 스승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햇살과 공기 그리고 새로운 아침과 일들을 만난다. 희로애락의 감정들과도 만나고 또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을 갖기 위해 노력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만남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만남 속에 연결되어 살아간다.

불교에서는 인연설을 통하여 만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한 생각에서부터 자신의 내면과 깊이 하나가 되는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인연법에 적용을 받는다. 모든 만남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요. 또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니, 어떤 만남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 하나 움직이고 몸을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도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와 소태산의 만남 또한 우연이 아니며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소태산은 우주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삶을 고민하며 발심하고 불생불멸한 성품의 발견과 인과보응으로 이 세상은 건설되고 운행되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소태산은 석가모니의 생로병사의 이치를 깨치려는 발심과 〈금강경〉에 마음의 본질을 밝힌 것에 크게 공감한 것이다.

온갖 고행 끝에 스스로 의심을 해결하고 대각을 이룬 후 만나게 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대종사의 깨달음에 대한 확신과 교화방향이 설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외로운 구도의 길을 달려 같은 진리관과 세계관을 품은 동지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얼마나 황홀했을까?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방향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든든함과 반가움은 주저 없이 연원을 두고 장차 회상을 열 때 불법으로 주체 삼으리라는 포부를 정하게 된 다.

누군가 자신이 가장 듣기 좋은 말은 "나도 그래"라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이 말은 "당신의 뜻과 같습니다"라는 공감의 말이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의 경험 차이를 넘어, 하나가 되어 만나는 순간이다. 석가모니와 소태산의 만남은 2500여 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소태산의 법에 인연하였으니, 날마다 소태산 대종사와의 만남을 쉬지 않고 법맥이 흐르도록 점검하며 하루를 시작해 보자. "만나지는 인연들은 또 어떤 연원인가"를 기다리며, 아침을 맞는 것은 참 설레는 행복이 아니겠는가.

/와룡산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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