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서 제일 잘한 일은 전무출신한 일”

옛말에 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라 했다. 일원회상과 아무 연고가 없었어도 평생 전무출신의 길을 걸어왔던 찬타원 이수진(74·贊陀圓 李守眞) 원로교무. 인연이 있으면 천리가 떨어져 있어도 만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중이 되어야겠다

김천이 고향이었던 그는 딸만 일곱인 집에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의 성화를 못 이기고, 아들을 낳기 위해 작은 어머니를 얻었다. 제일 큰언니는 결혼한지 3년만에 형부를 잃고 아이도 없이 친정을 왕래했다. 아들을 못낳아서, 남편이 죽어서 받는 여자 인생의 고달픔을 어려서부터 느껴왔던 그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고민이 화두가 됐다.

그러던 어느날 동생을 버스에 태우러 나갔는데 스님 두명을 만났다. 한 스님이 와서 "네 아버지 목수네"하고 말을 걸었다. 깜짝 놀라 "우리 아버지를 아세요?" 되물었지만, 스님은 "네 어머니 흉터가 있구나"하고 족집게처럼 어머니 이마에 흉터있는 것까지 알아 맞췄다. '도통한 스님인가보다'는 생각에 마음에 맺힌 질문을 던졌다.

"스님 저는 무엇을 하고 살면 좋겠습니까?", "너는 중이 되면 좋겠다."
그 때 '중이 되어야겠다'고, 그러면 어머니와 언니처럼 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무출신은 하고 싶은데

대구에서 직장을 다닐 때였다. 하루는 친구가 '도인이 계시는데 같이 인사가자'고 했다. 따라가니 달타원 이정화 종사가 있었다.
"고향이 어디냐?", "김천입니다"
"나도 김천인데. 형제는 어떻게 되느냐?"
"딸만 일곱입니다"
"우리도 딸만 일곱인데. 너는 앞으로 아들 노릇 해야겠구나."

아들 노릇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출가하라는 말씀이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출가를 하려고 보니 한가지가 걸렸다. 예전에 남자친구를 사귀었던 일 때문이다.
"그때는 남자를 사귀면 허물인 줄 알았어."

그는 순수한 마음에 대학노트에 집안 환경, 생각과 꿈, 남자친구와 만나고 헤어진 과정을 모두 적어 교무님께 드렸다. 그런데 큰 호통이 돌아왔다.
"'너 같은 것이 무슨 전무출신하냐. 자격없다'하시면서 야단을 치셨지. 나는 다 고백하고 참회한다고 드린 것인데."

울었다. 전무출신은 하고 싶었는데 야단치는 교무님 앞에서 더 이상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달타원 종사를 모셨던 공양원이 딱한 사정을 알고 총부와 이어줬다.

▲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던 좌산 이광정 상사와 함께.

육타원 종사의 구원

공양원 소개로 당시 총무부장이던 다산 김근수 종사를 알현했다. "전무출신하고 싶어요"라고 말씀드리니 허락해 주셨다. 당시 여자기숙사 총무였던 초타원 백상원 종사와 함께 여자기숙사 사감인 아타원 전팔근 종사께 인사드리고 여자기숙사에서 간사근무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때가 원기49년이었다.

총부와 성탑이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전생에 총부에 살았던 것만 같이 친근하고 좋았다. 당시 좌산 이광정 상사는 남자기숙사 사감으로 있었고, 경산 장응철 종법사는 원불교학과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교무훈련만 되면 힘들어졌다. 당시에는 훈련을 총부에서 한달씩 했는데, 달타원·항타원 종사가 총부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 어른들이 내가 남자를 알았다고 하니까 크게 걱정하셔서 시험해보려고 야단을 친거야. 그런데 이제는 당신들 모르게 출가를 하니 너무나 섭섭하셨던 것이지."
인사하러 가면 돌아 앉아버리셨다. 뒤에서 큰절만 올리고 나와야 했다. 어느날 이 사실을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가 알게 됐다.

육타원 종사는 달타원·항타원 종사를 불러 "어린 것이 전무출신하고 싶어서 그런건데 이게 뭔 일이여"하고 야단을 쳤다. 그 뒤로 두 어른은 섭섭함을 내려놓으셨다.

간난한 학창시절

간사생활은 지독했다. 장갑도 없이 두레박으로 한 말이나 되는 물을 길러 70명 학생이 먹은 그릇을 씻고 밥도 했다. 손이 얼고 갈라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보고 엄마를 찾으며 울기도 했다. 그래도 못하겠다는 마음은 안들었다. 농사와 공부를 병행해야 하는 영산선원 생활도 쉽지 않았다. 동산선원 수학시절에는 각산 신도형 종사를 모시고 공부한 <정전> 문답내용이 지금 <교전공부> 내용이 됐다.

가라면 가라는대로

첫 근무지는 법무실이었다. 동창인 구타원 오희선 교무와 함께 발령받았다. 음식솜씨 좋은 오희선 교무가 식사를 맡고, 그는 자처해 설거지와 청소를 맡았다. 뜻 맞는 동지와 큰 어른 모시는 재미로 살았다.그런데 어느날 급히 유성교당으로 가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발을 뻗고 울었다. 하지만 이내 유성교당에 마음을 붙였고 학생법회를 만들고, 일반법회도 정성껏 맡았다. 1년이 지나니 또 대전교당 부교무로 가라고 했다. 그때 청년법회를 창립했다. 김조영 교무가 당시 청년회원으로 인연이 됐다.

대전교당 연원으로 공주교당을 냈는데, 또 1년만에 초대교무로 이동했다. 공주교당에서 오우성 교무를 출가시키기도 했다. 다음 발령지는 부산교당이었다. 법무실에서 가라고 하면 그렇게 아무 불평없이 이동했다. 그런데 작은 교당들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큰 교당은 너무 불편했다.

▲ 총부에서 간사시절 대산종법사와 함께(아래 우측).
니가 정신이 있냐없냐

다음 근무지는 고향인 김천이었다. 아담한 흙집이었다. 교당을 새로 지으려고 천일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화가 왔다. 옛날 남자친구였다. 고향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잠깐 얼굴을 보자고 했다. 걱정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고민하다 간사시절부터 심사(心師)였던 좌산 종사를 뵈러 서울 종로교당을 찾았다.

"'제가 이 사람을 만나서 잘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까 '니가 정신이 있냐없냐'하시면서 화를 내셨어. 부교무보고 당장 총무부장에게 전화 넣으라면서 '바로 인사이동 시켜라'고 하시는 거야."당시 경산종법사가 총무부장이었는데 "옛날 남자친구가 왔다면서야"하고 전화가 왔다. 그 뒤 제주도 애월교당으로 발령이 났다.

교당에 가고 싶습니다

애월교당에 9년을 살았다. 어린이집 짓는데 고생했다. 업자를 잘못만나 1억이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이것도 내 업이다'하고 고생해서 빚을 다 갚고 나왔다. 애월교당에서 김법조 교무를 출가시켰다. 원평교당에서는 농촌교화를 재밌게 했다. 동네마다 다니며 교화단회를 하고, 법당과 식당채를 리모델링 했다. 방과후 공부방도 만들고 알뜰히 모은 돈으로 땅도 구입했다.

다음 근무지는 영모묘원이었는데 묘지에 풀만 자란 것이 못마땅해서 영산홍을 심기 시작해 지금의 영모묘원이 조성됐다. 또 당시에 받지 않았던 묘지 관리비도 고집해서 받았다. 관리비 없이 앞으로 운영이 어려워질 것 같아서다.

어느날 원평교당에서 천도재를 지내달라는 요청으로 갔는데 교당이 너무 그립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벌곡에 계시던 좌산 이광정 종법사를 찾아가 무조건 엎드렸다.
"왜그래? 왜그래? 말로해." 깜짝 놀란 좌산종법사가 물었다. "교당에 가고 싶습니다."

마지막 임지는 울산교당이었다. 영모묘원있을 때 원광디지털대학교에서 배운 다도로 문화교실을 열었다. 교도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재주있는 교도들도 많아 뜨개질, 미술작품 등 원광가족 작품전시회도 개최했다. 당시 어려운 새등이문화원을 도우면서 교도들과 같이 그릇도 만들어 다양한 문화교화를 펼쳤다. 명촌교당도 내고, 원음어린이합창단도 잘 이끌어 교화전성기를 맞았다. 이 때 김인준 예비교무도 출가시켰다.

전무출신과 자부심

고창원로수도원에서 차밭을 가꾸며 지인들에게 차 선물하는 재미로 살고 있는 그.
"내 일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 전무출신한 일인 것 같아. 너무 신기하고 다행스러워. 성불제중은 여기서 안나가고 열심히 살면 돼. 안나가기만 하면 앞길이 열리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어. 행복은 멀리서 구하지 말고 지금 나한테서 구해야 돼."행복으로 알고 힘써 살아왔던 전무출신의 길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미소에서 자연스레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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