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경 교도/경기인천교구 안양교당
착심 여의지 못하면 열반 얻지 못해
주착된 그 마음을 놓아버려야
감사한 마음 오래 지속할 수 있어

내가 원불교 입교해 받은 법명이 성품 성(性), 공경 경(敬)이다. 성품을 공경스럽게 다스려야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약간 우쭐했다. 그러다 솔성요론 6조 '한편에 착하지 말며'라는 주제를 받고 의두를 걸어보았다. 그 결과 성품자리에는 본래 상하귀천이 없는 자리임을 알았다.

첫 번째, 한편에 착(着)하는 것은 무엇이 들어 그러하는가. <대종경>을 보면, 염라국과 염부사자는 다른 데 있지 않고 내 권속이며 내 집인 것처럼 중생의 삶은 착심의 세계나 다름없다. 돈이나 명예, 자식에 대한 착심은 외적 착심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내적 착심은 개인 습관에 따른 관념이다. 집착을 하게 되면 객관적 판단을 하기 어렵고, '이것이 옳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아집에 묶이면 한 쪽에 치우쳐 편벽된 마음을 쓸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식에 대한 착심은 어떤 부모라도 죽을 때까지 눈에서도 마음에서도 뗄 수가 없다. 자식 사랑에도 과불급과 편착심이 없이 중도에 맞게 해야 나중에 후회를 하지 않는다. 노년에 이르면 자식들을 위해 달리 해줄 것은 없고, 손 놓고 있을 수 없어 자녀를 위해 심고나 염불로 건강과 행복을 비는 그 행위를 착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상하귀천이 없는 그 깨친 성품자리가 툭 터져서 내적이든 외적이든 착심을 걸림 없이 쓰지 못한다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한다.

두 번째, 법문 말씀에 의지해 한편에 착하지 않으려는 공부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대종경> 수행품 28장에 "무슨 일에나 지혜 어두워지게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있나니 하나는 욕심에 끌려 중도를 잃어서 지혜가 어두워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소질이 있는 데에만 치우쳐 집착되므로 다른 데는 어두워지는 것이다"고 했다.

중도의 진정한 의미는 옳은 것이라고 해도 집착을 하거나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설령 내 의견이 옳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의견을 존중하면 그때는 몰라도 나중에는 상대방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스스로 사과해 올 수도 있다. 이것이 진정한 화합이자 중도의 길이라 생각한다.

<대종경> 천도품 3장에 "누구에게 원수를 맺어 원망심을 갖거나 애욕경계에 집착하여 그 착을 여의지 못한 경우가 있거든, 그 마음을 놓아버리는 데 전력하라. 그 착심을 여의지 못하면 자연히 참 열반을 얻지 못하여 그 착된 바를 따라 영원히 육도윤회의 원인이 되나니라"고 대종사는 누누이 말씀해 주고 있다.

세 번째, 착을 없애는 데에는 삼학공부로 다스려야 한다. 대종사께서는 삼학공부로 쉽게 밝혀주고, 가져다 활용만 하면 된다고 했다. 정신수양 공부를 하여 넓게 살 것인가 아니면 좁게 살 것인가. 사리연구 공부로 밝게 살 것인가 아니면 어둡게 살 것인가. 작업취사 공부로 바르게 살 것인가 삿되게 살 것인가로 나눌 수 있다.

착(着)하게 되면 좁아지고 어두워지고 삿되어지듯이 착이 없는 솔성자리는 넓고 밝고 바른 길이 열리게 된다. 즉, 연구력이 없으면 가려지고, 가려지면 수양을 못해서 끌리고, 끌리면 취사를 못해서 글러진다. 예를 들면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붙어 있으면 고지혈이 생겨 혈관이 막히듯이 우리 몸에도 필요 없는 것이 막혀 있으면 병이 된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광대무량한 일원의 세계처럼 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본래 상하귀천이 없는 우리들 마음이다.

네 번째, 한편에 착하지 않게 되면서 얻은 소득이다. 선(禪)으로 다스리니 한편에 착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아침에 선을 하지 않으면 착심에 놀아난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향을 피우고 먼저 21배를 올린 후 선을 한다. 허리가 아파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반가부좌를 튼다. 일원상서원문 21독을 하루도 빠짐없이 묵독으로 암송한다. 이 방법을 통해 선 아닌 선 흉내를 내는 까닭은 수시로 잡념이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1독에 각각 나의 마음을 담고자 노력한다.

일원상서원문 첫 독은 세계의 평화와 나라의 안정을 간절히 기원하며 올린다. 두 번째는 느닷없는 사건이나 자연재해,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거나 재산손실 없는 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한다. 세 번째는 소외계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도 조용한 평화가 깃들 수 있게 기원한다. 그리고 맨 마지막 21독에는 양심상 차마 자신을 위해 뭘 해달라 빌 수 없어 '고단한 내 업력이 자식들에게 대물림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반가부좌를 푼다. 이렇게 날마다 30~40분 기도를 올리며 하루를 새롭게 시작한다.

간절히 기도드린다 해서 뜻이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오래 지속되면 저절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기적이란 다름 아닌 행복을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일일 것이다. 참선을 비롯해 천여래 만보살 대열에 진급하고 걸림이 없는 원불교인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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