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법종 교무/휴무
고려불교·조선 유교가 망한 이유는 귀족화·형식주의 때문
교법에 바탕해 얼치기 세속주의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야

대종사가 영육쌍전법을 밝히며 새 세상의 종교는 수도와 생활이 둘 아닌 산종교가 돼야 하며, 이는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하는 법이라 했다. 또 개인·가정·사회·국가에 도움을 주자는 뜻을 가진 불법활용은 불법의 본의는 세상 일을 더욱 잘하자며 널리 쓸모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지혜는 높이 보고 멀리 생각하는 것이다. 유용한 법을 활용하고 그 행동을 본받아 누구에게나 도움되는 것이라면 길이 환영하고 번영할 것이다. 정신을 밝히는 법이 실생활에 도움이 적다면 대중에게 요긴한 법이라 할 수 없다. 이는 '불법과 생활'간의 괴리가 발생하며, 일과 이치가 병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려불교가 망한 까닭은 불교가 귀족화 되었고, 조선이 망하게 된 것은 유교가 형식의 가면에 떨어져 국가나 대중에게 여러모로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 종교의 위기는 물질 풍요와 얼치기 세속주의에 편승해 바른 정신과 자력생활의 퇴행으로 자정 능력을 잃었다는 데 있다. 영육쌍전 하는 사람은 언행일치·내외겸전·문질빈빈이 되고 모든 환경과 법을 살려내는 주인공으로 정신과 생활을 살려내야 된다.

〈음부경〉에 "군자는 얻으면 몸으로 굳게 지킨다(固窮)"했다. 고궁의 상이한 뜻을 '어려움을 불고하고 참을 지킨다' '진실로 궁구한다'는 말과 같이 내가 먼저 힘써 행하기 때문에 사리에 밝게 되고 기질변화와 함께 능함을 얻을 수가 있다. 오롯한 일심을 만들고자 하면 부당한(별로 중요치 않는) 원과 행을 그쳐야 하며, 일과 공부에 전념하면 사리간 밝아진다. 그러나 사리와 사리 간에 분별과 증애를 일으키고 간격과 차별을 세우기 때문에 밝지 못한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다르고 이판이어야 만이 큰 공부를 할 수 있다거나 사판이라야만 생활 할 수 있다는 허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병행이 안 된다. 옛글에 '도(道)는 나에게 이로움이 없는 것 같으나 항상 이로우며(道無利我 我常利), 경계가 사람을 어리석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어리석다(境不痴人 人自痴)'했다.

경계만 탓하거나 공부를 등한시 하는 것은 자신의 그릇된 편견으로 공부와 생활을 간격 짓고 조각낸다는 것이다. 일보다 공부가 우선이 되는 것이지만 공부와 생활을 여의지 않으며 오롯하고 질적인 공부가 되고 있는가 자문해야 된다. 원숙한 심사(心師)·심우(心友)가 많으면 좋겠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라는 뜻은 일원의 진리와 세상의 필요한 모든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어 인연과 일속에서 불공의 효과가 되도록 몸과 마음을 잘 쓰라는 것이다.

원불교 초기교단의 재가출가 교도들은 공부하고 교화하는 즐거움과 유지답 관리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좋고 나쁜 갖은 일들이 몸에 밴 가운데 공부심과 함께 안분자족하며 심락을 누렸다. 대산종사는 '성현은 부지런 단단'이라 했다. 지극한 동(動)과 지극한 정(靜)을 바탕해 여의지 않고 큰 정성과 안정으로 끊임없는 공부와 생활 속에 활불로 나투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공부에 노력하면 수양력·연구력·취사력이 향상돼 공부의 문리를 얻게 된다. 또 일을 지내다 보면 학습능력·순발력·집중력·평상심·효율성·안목 등이 향상해 일의 문리를 얻어 일과 공부간 일행삼매(一行三昧)일상삼매(一相三昧)를 얻게 된다.

대종사께서 바다를 막은 이유를 "…조소를 받으며 겸하여 노동의 경험도 없는 사람들로서 충분히 믿기 어려운 이 일을 할 때에 그것으로 참된 신심이 있고 없음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이 한 일의 시(始)와 종(終)을 볼 때에 앞으로 모든 사업을 성취할 힘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또는 소비 절약과 근로 작업으로 자작 자급하는 방법을 보아서 복록이 어디로부터 오는 근본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그 괴로운 일을 할 때에 솔성하는 법이 골라져서 스스로 괴로움을 이길 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모든 생각으로 이 일을 착수시켰노라"고 했다. 일 가운데 깊은 공부가 있다는 것이다.

〈소서(素書)〉에 '가장 밝은 것을 체물(體物)'이란 말은 몸소 겪어봐야 밝아진다는 것이다. 부단한 훈련과 함께 자주 여러 일들을 몸소 접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 속에 자연 소통과 공감이 되고 합력이 되어 공부와 일을 성취해 나갈 수가 있다. 일과 공부에 거울이 되고 세상일을 더 잘하는 불제자가 되어야 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