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찾아주시는 어르신들에 의해 '보화당'이 됐다. 길을 가다가도 나를 만나면 "어이~ 보화당 어디가?" 하며 반갑게 인사하는 어르신들. 더욱 놀라운 건 역전보화당을 떠나 함열교당 은혜마을과 진안 원광허브에 근무하면서 3년이란 세월을 떠나 있었는데도 "보화당~ 어디 갔다 왔어?" 하며 나를 기억해 주신거였다.

내가 '보화당'으로 불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역전보화당에서 근무할 때 나는 '모든 일에 맡은 바 진실과 정성을 다하고, 동료와 손님들에게 좋은 인연이 되자'는 신념으로 최선을 다해 근무했다. 보화당과 내가 하는 일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산 것이다.

역전보화당 있을 때는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어르신들을 차로 태워다 드렸다. 그러면 어르신들은 보화당에서 침도 맞고 레이저 치료도 받았다. 어르신들이 혈압이 떨어지시면 뇌경색으로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레이저 치료는 이를 완화시켜 주는 효능이 있어 인기가 좋았다. 어르신들은 거동도 불편하셔서 매일 차량운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 동네 가서도, 저 동네 가서도 모두 나를 편하게 보화당이라고 불렀다.

특히 약배달을 할 때에는 나름대로 최대한의 서비스를 해드린다. 약을 따뜻하게 데워 드린다든지, 복용시간을 알려드리면서 "꼭~ 이 약을 먹고 건강하세요"라는 당부인사를 한다. 환자분이 보약과 함께 마음으로써 병을 다스리라는 염원에서다. 그 분의 얼굴을 마주보며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것이 습관이 됐다. 어르신이나 손님들에게 정직하게 약을 드리고 인사함으로써 내 마음은 점점 편해져 갔다. 이는 보화당과 환자들을 위하는 일이기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대충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마무리하고 나왔다.

또 약배달을 갔다가 환자나 어르신들이 시내에 나갈 일이 있다고 하면 운행코스를 설명해 드리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태워달라고 하면 꼭 약속을 지켰다. 한의원 내에서도 자리에 앉아 있다가 손님이 오면 꼭 일어나 눈을 보고 반갑게 "어서 오십시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연로한 어르신 집에 약배달을 하러 가면 수리할 것이 있으면 꼭 해드리고 나온다. 혼자 사시는 어르신이나 자녀들이 출근해 혼자 계시는 어르신들이 허물없는 나를 보면 이것저것 부탁을 하시는 것이다. 전구가 안 들어온다든지, 무거운 물건을 옮겨야 된다든지 늙은 몸으로 해결하기 무척 어려운 일들이었다. 그러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렸다.

나는 손님들의 이름과 사는 마을, 집, 특이사항을 전부 일일이 기억했다. 심지어 교회의 지위와 부녀회장까지 잘 기억했다가 꼭 호칭으로 불러드리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익산시 근방에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그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고 많은 분들과 허물없이 친해졌기 때문이다. 역전보화당에 있다가 이리보화당으로 옮기고 나자, 당시 나를 기억하던 손님들이 이리보화당으로 많이 찾아오신다. 그때도 그랬지만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정직과 정성을 다하자'는 정직·봉사에 대한 생활신조는 아직도 갖고 있다.

그때는 경리 일도 함께 했다. 오후에는 약배달을 했는데 함열을 넘어 강경까지도 배달을 다녔다. 지금도 이리보화당에서 오전에는 사무실 업무를 보고, 오후 3시 이후에는 시내권 배달을 다니고 있다.

이렇게 나는 보화당에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내 삶은 온통 보화당이 되었다. 내 개인의 일, 가정사보다도 보화당이 먼저였다. 내 일, 내 집, 내 모든 일의 중심으로 하나가 됐다. 지금도 어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 보화당의 불편한 사항을 다 개선해 나가고 있다.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리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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