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흥교당 대각전 처마의 모습. 초가 형식의 전통 목구조 건축이 특징이다.
초기교단 역사의 고증 터

신흥마을 '묘량수신조합' 창설

원기5년(1920) 3월(일부기록 6월)에 영광군 묘랑면 신흥마을에 '수신조합'으로 시작된 원불교 신흥교당, 원기12년(1927)에 불법연구회 영광지부 신흥분회로 편입된 이래, 설립 90년을 자랑하고 있는 유서 깊은 교당이다. 현재 600여 개에 이르는 원불교 교당 가운데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됐을 뿐 아니라, 교당 설립 초기의 역사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교당이기도 하다.

신흥마을이 초기교단 역사에 중차대한 역할을 한 데는 일산 이재철 종사의 인연이 깊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구인제자인 이재철 종사의 인연으로 도산 이동안 선진이 대종사를 만나게 됐고, 묘량면 신흥마을 청년인 이동안 선진은 신흥에다 스승의 대도정신을 받들어 펴기 위한 조합 창설을 계획했다. 이동안 선진은 처음 형제와 사촌들을 설득하고, 차차 주민들에게 함께 할 것을 권하면서 길룡리의 방언조합을 모방해 '묘량수신조합'이라는 회합체를 구성했다. 생활개선과 자녀 교육 등 현실에 당면한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도 남과 같이 잘살아보자. 우리 자녀도 어떻게 해야 잘 가르칠 것인가"하며 조석으로 조합원들을 만나 설득했다. 묘량수신조합의 활동은 소비 절약과 근검저축 장려, 공동작업을 통해 단합심과 협동 정신을 갖게 하고 노동과 생산의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갔다.

수신조합이 제 역량을 발휘한 것은 원기9년 흉년이 들어 아사자가 속출하는 시기였다. 이때 조합금을 풀어 좁쌀 수십 섬을 만주에서 사들여 조합원들에게 원가로 제공해 그해 춘궁기를 무사히 넘겼다. 이동안 선진은 지도자로서 역량을 인정받게 되고 수신조합은 신뢰가 두터워졌다. 원기10년 가을 수확기에 부채를 거의 청산하게 되었고, 조합실도 마련하게 됐다.

원기5년부터 12년까지 7년간의 수신조합 총자산은 1,100여 원으로 불어나며 조합원들은 모두 불법연구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애초에 수신조합을 발기한 이동안 선진은 1동리 하나만을 목적하고 조직체를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이 뜻을 잘 아는 조합원들은 그의 의견에 두 마음 없이 협의 결정해 조합 자산을 불법연구회 상조부로 귀속시켰다. 400원 상당의 조합실을 불법연구회 집회소(현 신흥교당 구건물)로 희사하고, 700여 원은 조합원 각자에게 분배해 불법연구회 상조부 저축계에 예금토록 했다.

불법연구회 신흥지부

갑자년을 기해 익산 땅에 새 회상을 설립하자 원기12년(1927)에 영광 신흥에도 불법연구회 회관이 설치됐다. 영산출장소와 경성출장소에 이어 세 번째 지방회관 설립이었다. 수신조합은 정식으로 불법연구회 간판을 붙이기 이전에 이미 회관을 마련해놓았다. 불법연구회 회관은 수신조합의 조합실을 개보수한 것으로 당초 이형국 선진이 자신의 집을 희사한 것이었다. 이후 이형국 선진이 불법연구회 회관 발족을 제안하자 회원 일동이 찬성하면서 조합실이 불법연구회 회관이 되어 불법연구회 신흥분회(출장소)가 설치됐다. 이렇게 신흥분회는 영광지부 관리 하에 원기12년 3월 설립·운영되면서 열흘마다 예회를 보게 됐다.

예회는 음력 8일·18일·28일 매월 세 차례 열렸다. 영광지부에서 6일을 기해 예회를 진행한 담당 교무가 이튿날 신흥분회 출장을 다녀가는 형식이었다. 회원들은 신흥마을을 비롯해 대천, 신촌, 연촌, 왕촌 등지의 사람들이었으며, 주로 신흥과 대천의 이씨 일가들이거나 그들의 친척이었다. 평균 출석 인원은 20여 명 안팎이었다.

원기20년(1935) 4월 익산 총부에서 열린 정기총대회에서 신흥분회(출장소)가 지부로 승격하게 된다. 원기21년(1936) 12월에는 회원의 증가로 법당이 협소해 교도들이 목조 초가 5칸을 총공사비 500원으로 건축해 현재까지 80여 년을 당초 건립 용도대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이때 건립된 것이며 그때의 모습에서 지붕재료만 변화했고, 건립 당시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전한다. 당시 법당에 설치한 일원상은 현재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신흥교당이 배출한 역대 전무출신은 41명이며, 신흥마을 태생 전무출신은 모두 80여 명에 이른다.

▲ 신흥교당 대각전 내부의 모습. 건립 초기 검은테 일원상이 보존돼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대각전

원불교 신흥교당은 원기91년 5월9일 원불교문화재 교보 제10호로 지정됐다. '원불교문화재관리대장'에 따르면 사적 명칭은 원불교 신흥교당, 관리면적은 4,912㎡이다.

교단에서는 원기101년 '영광 원불교 신흥교당 대각전'으로 문화재등록을 추진했다. 신흥교당 이호인 교무를 비롯해 문화사회부는 원기100년 말부터 문화재 등록의 준비를 시작했고, 원기101년 3월7일 영광군에 신청서를 제출한 것이 실마리가 됐다. 그해 2월27일 좌산상사와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신흥교당을 방문했고 영광군수와 관계자 20여 명이 동행하면서 빠른속도로 등록추진이 진행됐다. 영광군에서는 전라남도를 경유해 문화재청에 등록신청서를 제출했고, 4월7일 원광대학교 박윤철 교무와 김희태 전남도청 문화재전문위원이 신흥교당을 방문하면서 신청서 자료 보완을 논의했다.

신흥교당 대각전은 초기 민족종교 공간으로서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성에서도 높은 가치가 인정돼 지난 8월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지정이 예고(문화재청공고 제2017-264호)됐다.

신흥교당 대각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정면으로 툇마루를 뒀다. 배면과 좌측면에 쪽마루가 있었다고 전하며, 이는 기둥의 홈자국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면 주칸은 약 8자(2,450mm)이며, 정칸에서는 9자(2,750mm)로 변화를 줬다. 측면 주칸도 동일한 2,450mm이며, 내부에서는 기둥을 생략했다. 원형을 알 수 있는 기존의 사진에 의하면 기단은 자연석 외벌대로 확인되며, 자연석 초석을 두고 각주를 세웠다.

내부는 통칸형으로 정면 고주와 배면 평주를 연결하는 대들보를 걸어 깊이 4,900mm로 큰편이며 정면 4칸, 측면 2탄을 모두 통칸형으로 처리해 넓은 예회실로 구성했다. 마루는 현재 후로링 마루이지만 원래는 예회실 모두가 통칸의 온돌방이었으며, 좌측면에 아궁이가 있었고, 우측방 아궁이는 우측면 외부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아궁이들은 기단을 보수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건립초기의 초가 가구구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관리가 양호한 편이다.

신흥교당 대각전은 익산성지 대각전이나 영산성지 대각전과는 달리 대규모 성지가 아닌 전통마을에 소규모로 건축됐고, 일식목조 기와지붕이 아니라 초가 형식의 전통적 목구조로 건축됐다는 차별성이 있다. 또한 영광에서 발흥한 민족종교 원불교의 초기 종교공간으로서의 역사성과 '묘량수신조합'으로 시작한 공동체운동(자생적 조합운동)이나 신흥마을의 80여 명에 이르는 원불교 성직자 배출 등은 초기 원불교 역사는 물론 향촌사회사와 공동체운동문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 원기21년 12월 회원 증가로 법당이 협소해 목조 초가 5칸 규모의 대각전을 건립해 현재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근대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