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금산사에서 짚신 삼은 이유…만날천날 불공만 받지 말고 세상나가 일하라는 퍼포먼스
변산 봉래정사, 사은사요 삼학팔조 교강 발표…참이 서고 슬기 빛나는 후천개벽 예고해


ㆍ통일신라 때 김제 만경현 대정리의 12세 정(井) 소년이 사냥을 갔다가 무논의 온 개구리가 시위를 하듯 왁왁 떼를 쓰는 것을 보고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바짝 마른 개구리 30마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버려져 있었다. 작년 이맘 때 소년이 잡았던 개구리였다.

ㆍ임진왜란 전, 진묵 소년은 김제 만경 불개에서 살았다. 모내기하는 농부들이 장난삼아 개구리를 잡아 패대기쳐 사지를 뻗고 바르르 떠는 걸 보고 진묵은 충격을 받았다.

ㆍ갑오농민전쟁에 패하고 민심이 황폐해졌다. 영광 길룡리 아이들이 놀다가 뱀을 발견하고 놀라 달아났다. 한 아이가 가만 지켜보더니 뱀의 꼬리를 잡고 휘휘 내젖다가 멀리 던졌다.

위 이야기는 김제 만경의 두 총각의 출가 동기이고, 최근세 영광소년 박진섭은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에 대한 탐구력을 계속 키워나가는 일화다.

▲ 변산 의상봉 마천대 부사의방장. 진표가 천일간 참회수행하고 미륵사상이 움튼 곳이다.
정 소년의 두타행

금산사를 미륵도량이라 한다. 그 소이연은 부안 변산 의상봉의 부사의방(不思議方)에서 시작된다. 변산 최고봉 의상봉(508m)은 신라 때 고승 의상대사의 수양처이고 그 아래 천길 벼랑바위 마천대는 진표율사의 수행처다. 12세에 출가한 정 소년의 스승 숭제(崇濟) 법사는 당나라에 유학을 가 정토불교를 대성시킨 선도(善道) 문하에서 법을 배웠다. 미륵사상의 발원은 진표의 사승 숭제법사에서 시작된다. 숭제는 정 청년에게 밀교경전을 주며 당부했다.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 지장 두 보살 앞에서 지성으로 참회하고 계법을 받아서 널리 전하도록 하라"

〈공양차제비법〉은 불가사의의 저술로 문수보살이 설하였다. 정 청년은 그 책을 보고 두타행(頭陀行)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수행처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의상봉 마천대를 택하였다. 방은 암보다 규모가 적은 처소로 저술자의 이름을 따 부사의방이라 한 것 같다. 〈점찰선악업보경〉은 지장보살이 참회법을 설한 경이다. 3년간 1,000일을 흐느껴 울며 죽을 때까지 참회 수행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4평 남짓 공간 벼랑바위에서 태산이 무너지듯 5체 투지하여 이마와 두 팔굽과 무릎이 깨어져 피가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마침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대갈통이 절벽에 굴러 떨어지는 수행 끝에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백척간두에 올라섰다. 청년은 최고봉의 깨달음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고 혹독하게 정진, 골통이 절벽 아래로 내던져진 그 순간 시방세계와 하나가 되어 우주 광명과 일체가 된 경지에서 천안통이 열렸다. 정 청년은 도솔천을 보았다. 지장보살이 미륵을 모시고 나타났다. 미륵이 정 청년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순간 피범벅이 되어 산산조각 흩어졌던 몸이 온전한 몸으로 돌아왔다.

"장하다. 대장부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참회하였구나"

미륵은 새끼손가락 두 마디만한 패쪽 두개에 8과 9가 새겨진 문자의 간자를 주고 의발을 전했다. 그리고 '참을 나타내는 것이 미륵세상' 진표(眞表)라는 법명을 주었다. 미륵으로부터 간자를 받은 것은 이때까지 세상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처음 해낸 파천황적(破天荒的)인 사건이었다. 미륵은 대자, 지장은 대비, 불교를 대표하는 보살이다. 미륵과 지장의 서원을 합치면 대자대비(大慈大悲), 8과 9는 본래 그대로 법과 새로운 불종자로 세상에 교법을 펴라는 메시지다.

진표의 하산 길은 바로 도솔천행이다. 풀과 나무들이 진표를 위해 길을 열었고, 골짜기의 높고 낮은 차별이 없어졌으며 온갖 날짐승 길짐승이 달려와 그의 앞에 엎드렸다. 호랑이 두 마리가 항상 그의 좌우에 호위하였다. 지장보살과 미륵을 친견한 진표는 참회수계 즉 참회불교를 집대성한 개조(開祖)가 되었다. 진표는 출가사찰인 모악산 금산사로 돌아왔다. 작은 절이지만 앞으로 진표가 할 일은 참을 드러내는 미륵세계 건설 불사이다.

▲ 진표가 철6장불을 세운 금산사 미륵전. 국보62호.
솥 위에 부처를 세워라

금산사에 용소(龍沼)가 있었다. 그 넓이가 사답칠두(寺畓七斗― 논 일곱 두락 1,400평)의 면적이다. 진표는 용소를 메워 6장불 미륵을 세우고 미륵전을 짓기로 하였다. 용소에 흙을 아무리 메워도 물이 줄어들지 않자 지장보살이 나타나서 숯으로 메우라고 일러준다. 모악산 인근 일대에 몹쓸 안질이 번졌다. 금산사 용소에 숯을 한 짐 붓고 연못물로 눈을 씻으면 낳는다는 소문이 났다. 안질 환자 12,000명이 숯을 지고 와서야 연못은 메꾸어졌다. 물의 왕 용왕(龍王)이 불에 타고 남은 숯 불기운에 의해 상승하는 수승화강(水昇火降) 수화기제(水火旣齊) 원리이다.

미륵불상 철6장불 세우기 위해 수차 좌대(石蓮臺, 현재 보물 23호)를 세웠으나, 자고나면 20m나 떨어진 마당에 가 있었다.(현 석련대 위치) 미륵이 현몽하여 일렀다. "솥을 걸어라. 그 위에 부처를 세우면 바로 서리라" 미륵이 가르쳐 준 대로 행하였더니 과연 미륵불상이 제대로 섰다.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로 오라

1901년 강증산이 모악산 대원사에서 도통하고 첫 제자 김형렬이 금산사 아랫마을 용화동 구리골 약방에 그를 모셨다. 추석이 되어 김형렬이 상제님을 대접할 길이 막연하여 가마솥을 팔 궁리를 하였다. 증산이 말하였다.

"솥이 들썩거리는 걸보니 미륵이 출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며 쇠꼬리를 하나 사오라고 하였다. 짚불에 쇠꼬리를 거슬리고 증산이 하늘을 가리켰다. 햇무리가 섰다.

증산은 화천을 앞두고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거라" 하였다. 1909년 증산이 죽자 그를 따르는 신도들은 금산사 미륵전에 증산 재림 치성을 들이기 시작했다. 1919년 8월21일, 박중빈은 법인성사를 마치고 송규를 변산 월명암에 보내고 첫 제자 김성섭과 금산사에 미리 와서 한달간 머물렀다. 그는 미륵전의 대불상을 보고 몹시 실망하여 숙소로 돌아와 일원상(一圓相)을 그렸다. 그때부터 한달간 매일 짚신을 삼기 시작했다. 11월11일(기미년 음력 九.十九) 증산사후 10번째 생일날이 당도하자 각지의 증산 신도들이 미륵전에 모여들었다.

나는 시루가 아니라 솥이여

미륵전에 증산생일 치성을 드리던 중이 죽었다. 그 소동에 박중빈이 조용히 미륵전에 와서 중의 이마에 열(十)자를 긋고 회생시켜 주었다. 증산 신도들이 상제가 갱생(更生)한 것으로 알고 박중빈을 대선생(大先生)으로 모시자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녀라 아녀라. 나는 시루가 아니라 솥이여"라 하였다.

일찍이 강증산은 이 말을 했다. "나보고 자꾸 동학을 반대한다고 하는디 나는 참 동학을 한당게로. 나가 수운선생의 대리 선생이여. 내 뒤에 진짜 큰 선생이 와서 큰일할겨."

솥의 들썩임은 대선생(大先生) 출현의 예고다. 햇무리는 증산선생이 일원상 시대를 예고한 것이다. 박중빈은 변산에서 4은4요 3강령 8조목 교강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가마솥에 콩 튀듯이 도인 나오리라" 하였다. 가마솥에 콩 한두 개를 위해 장작불을 떼는 법이 없다. 수천수만 콩들을 위해 불을 뗀다. 그 중 예민한 한 놈이 먼저 익어 톡 튀어나오면 연속해서 천불만성이 나온다.

강증산은 두승산 시루봉 아래에서 태어났대서 시루 증자 증산(甑山)이다. 박중빈은 "맨날천날 떡만 먹고 살 수 없제. 삼시세끼 밥을 먹어야제. 나는 만생을 살리는 솥이 될란다"라 하였다. 시쳇말로 '솥에 들어와야 산다'의 준말이다. 박중빈은 자호를 소태산(少太山)이라 하였다.

시루는 솥 위에 걸려야 제 구실을 한다. 솥과 시루는 불가분의 관계(甑鼎不離)이다. 밥은 세끼 안 빠지고 먹어야 살지만 시루떡은 1년에 몇 차례 특별한 행사에만 먹는다.

▲ 구수산 연안의 칠산바다 칠산도. 8인 제자들의 법호가 된 칠산도. 소태산은 자기혼자만 산이라는 호를 차지하지 않았다. 제자들에도 동 항렬의 '산(山)' 호를 주었다.
소태산이 짚신 삼은 이유

소태산은 자기 혼자만 법호를 쓰지 않았다. 방언공사를 같이하였던 8인 제자, 산상기도를 하였던 9인 제자들에게 동 항렬의 산(山)자 호를 주었다. 구수산 연안 칠산바다의 근원인 일곱 개의 섬 칠산도를 따 일산 이산 삼산…팔산 호를 주고 법성포 앞의 두개의 솥섬 작은소드랑섬 큰소드랑섬을 따 가장 나이 어린 제자에게 정산(鼎山), 자신은 소태산(少太山)이라 하였다.

소태산이 금산사에 짚신을 삼은 것은 미륵이 만날천날 불공만 받고 서있지 말고 짚신을 신고 세상에 나가 일하라는 퍼포먼스다. 소태산은 짚신 한 벌만 아니라 수천수만 켤레를 삼았다.

소태산은 변산에 입산하여 봉래정사에서 천여래만보살 사상 4은4요 3강령 8조목 교강을 발표하며 "앞으로 가마솥에 콩 튀듯이 도인이 나오리라" 하였다. 거짓과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 참이 나타나고 슬기가 빛나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 박청천 교무/교화훈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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