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은 교무

어릴 적 예술과 영성적 문화 체험의 영향을 받고 자란 고향 진도에 돌아가서 지역의 특성을 살린 교화를 해 보고 싶다는 뜻을 동지와 스승님께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나고 자란 곳을 교화지로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답들뿐이었다.

과거 성자들의 깨달음과 행적을 보면 자신이 태어난 곳과 지역에서 교화를 펼친 분은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소태산은 태어나고 성장한 곳에서 회상을 열지 않으셨는가! 구도하고 대각한 모습을 지켜 본 인연들이 찾아와 제자되기를 청하여 모였었다.

가까운 인연을 벗어나 교화지를 찾아 떠났던 성자들의 모습과는 달리 무엇이 소태산을 스승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했을까?

정법회상을 책임지고 나온 성자인지라 자신의 계획을 철저하게 실현할 혈심을 가진 8인을 선출하기에 이른다. 표준 제자의 자격은 권모술수로 어지러운 세상의 인심을 바로잡고, 인의(人義)를 세우는 주인공들이 될 것을 요구했다. 신기한 이적으로 허영심이나 욕속심을 경계하고, 인도정의가 평범한 삶 속에 자리잡고,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주라는 요청이었다.

과거의 시대는 신권의 시대였다. 태양을 숭배하고 신을 숭상하고, 교조를 신처럼 받들었다. 인간은 신과 종속의 관계로 요청과 명령을 받아 살아야 하는 숙명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후천 개벽의 시대는 인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천명했다. 흔히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이 인간의 입장일까?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을 살려내야 하는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사건을 비판만 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사건에 직접 뛰어드는 담당자가 되는 일이다. 동물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주체성을 가지며, 사람은 동물에게는 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각혼(覺魂)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아하!' 하고 진리를 깨닫고, 영혼을 다스리고 자유할 수 있는 영성의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각혼의 영성코드를 작동하고 살려내야 한다는 것은 사명이요, 주인의 역할이다. 동물적인 본능으로만 살 것인가, 자연적인 생명력으로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스스로의 선택이다.

소태산은 내 안의 부처를 살려내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생명을 낙원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인간으로 우리가 다시 이생에 인연한 것은 오직 성장을 위한 간절함이다.

사람만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일체생령을 살려내는 영성코드를 살려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다시 온 것이다.

여전히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사람다운 모습을 잃은 인간의 방황을 가슴 아프게 경험하고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주인은 어딜 가든 책임자의 눈으로 상황을 판단한다. 나의 책임범위를 지금 물어보자. 스스로가 우주의 주인으로 사는 선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소태산이 깨워주고자 했던 부처의 사명을 살려내는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인문개벽이요 사람개벽이다. 환경과 조건의 고통을 성장기회로 인식하는 자유로움이요, 가장 인간다운 역할을 찾게 되는 역사니, 자신이 있는 곳에서 책임지고 주인이 되어보자.

/와룡산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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