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같이 살림살이하려면 출가위에 표준 둬야”

불교 경전인 〈디가-니까야(Digha Nikaya, 장아함경)〉에는 부처님께서 '성지(聖地)의 중요함'을 다음과 같이 설법한다.

"아난다여,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가 있다. 어떤 곳이 넷인가? 그곳은 여래가 태어난 곳, 여래가 위 없는 정등각을 깨달은 곳, 여래가 위 없는 법의 바퀴를 굴린 곳, 여래가 무여열반의 요소로 열반한 곳이다."

영산성지는 원각성존 소태산 여래가 태어나고, 대원정각(大圓正覺)한 곳으로 3천년 전 석가모니 부처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성지의 네 가지 장소 가운데 두 개의 역사가 이뤄진 곳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영산성지 수호에 앞장서 왔던 청타원 이경옥(71·晴陀圓 李景玉) 원로교무. 그가 있었기에 영산 제3 방언공사라 일컬어지는 경작지 매입과 함께 유기농 농사 토대를 마련했다. 또 동네 주민과 얽혀있는 13개 성적지도 매입해 교단 숙제도 해결한다.

나의 고향, 영산성지

그의 할아버지는 훈산 이춘풍 선진이다. 고종사촌 동생인 정산종사가 도(道)를 구한다며 전라도에 건너가 사도(邪道)에 빠졌다는 소식이 문중에 퍼져 '환고향'시켜야 한다는 어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서 정산종사를 데려오려고 나선 이가 이춘풍 선진이다.

원기6년 변산에 주재했던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간 이춘풍은 소태산을 만나자 마음이 황홀해 '공자(孔子)를 뵈온 것 같다'면서 그의 제자가 된다(<대종경>변의품20). 다시 고향에 돌아간 이춘풍은 그해 12월 가족과 함께 전라도로 향했는데, 가족이 처음 거주한 곳은 변산 종곡유숙터였다. 이후 원기17년 다시 영산 길룡리로 거처를 옮겼고 여기서 이경옥 원로교무가 태어났다.

영산성지는 그의 집과 마찬가지였다. 친지들 모두가 경상도에 있었지만 영산선원 학원생들과 교무들 사이에 허물없이 자랐다.
"나는 출가를 해야한다 안 한다는 분별이 없었지. 어린시절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 그 생활을 하는 것인가보다 하면서 살았지."

중앙봉과 범현동 뒷산은 그의 등굣길이었다. 백수 동초등학교를 걸어가기 위해서 15리(6㎞여)를 걸어야 했는데 이 길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대각터 앞 강물이 불어나 중앙봉에서 강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면서 삘기를 뽑아 씹거나 진달래꽃 꺾어 머리에 꽂았던 생각도 새록새록했다. 고향이자 어릴적 놀이터였던 영산성지 일대는 훗날 그가 영산성지를 수호하는 원동력이 된다.

무연고 개척지, 동해

원기74년 그는 동해교당 개척을 선택했다. 그동안 원광대학교 도서관과 사감을 하면서 교화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뭉치고 뭉쳐서 선택한 곳이었다.

그가 강원도 시골 무연고지를 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교화할 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같이 부임한 이정길 교무와 이튿날부터 이곳저곳을 둘러보러 다녔다. 묵호항구를 돌아다니던 두 사람을 파출소 경찰이 보니 '이북 사람들인가'하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살펴봤다. 정복이 이북 여성들의 복장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색이 점잖아 차마 부르지 못했다.

다음날 그는 간만에 원광대학교에서 알고 지냈던 학생과장과 연락을 했다. 그랬더니 인사를 반갑게 하면서 그 지역 파출소장이 동생이라며 찾아가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가봤더니 두 교무를 이북사람으로 관찰하고 있었던 파출소 소장이었다.
"교무님들 몰라보고 불러서 취조할라고 그랬지요. 큰일날 뻔 했네요."

동해에 와서 처음 안면을 튼 사람이었다. 하지만 적막함은 계속됐다. 한번씩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게 전부였다. 안 되겠다 싶어 사람이라도 만나야겠다며 연구를 했다.
회지를 만들어 1년에 한두 번씩 만나 독거노인을 위해 봉사하자는 취지로 회원모집에 나섰다. 이름도 '등대'로 지었다. 경찰서, 소방서, 다방 안 가본 데가 없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회원활동에 동참해줬다.

청소년 교화도 좋은 아이디어가 솟았다. 탁구대를 교당에 놓았다. 근처 부평고등학교가 있는데 학생들이 와서 치기 시작했다. 그때 부평고에 다니는 최영도 교무를 출가(보증인)시켰다. 부평고 학생 회원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한번씩 열리는 강원도 교구청인 춘천교당에서 개최한 성가 경연대회에 가장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어느 선진은 "나도 초창 살 때 너무 막막해서 정산종사께 '제가 교단에 빚지는 것 같습니다' 여쭈니, 정산종사께서 '초창은 지키는 게 교화니라'하고 가름해 주셨다"며 감정받은 내용으로 그를 위로했다. 이렇게 동해교당 3년을 살고 동래교당, 전농교당, 영산원불교대학교를 차례로 살았다.

대서특필 좀 합시다

원기88년 영산사무소로 발령받은 그는 찻집 성래원(聖來苑)만 만들고 나오려 했다. 영산원불교대학교 재직시절 추운날 방문한 순례객이 덜덜 떨며 돌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보고 사감실로 모셔와 차(茶)를 대접하니 그렇게 기뻐했던 기억 때문이다. 원불교 근원성지임에도 순례객 하나 차로 대접할 장소가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그런데 발령받은 그 해부터 대각전에 물이 줄줄 새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곳을 살펴보니 영모전도 샜다. 소태산 대종사 시대의 산물들이 방치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영산사무소 근무해왔던 교무에게 물었다. "빗물이 오늘 처음 새는 거여?" "아니요" "이게 어떤 건물인데 이렇게 서로 일을 미루고 있는 거여?" 재무부장에게 전화해 막 큰소리쳐서 바로 고치도록 했다.
한번은 영모전 바닥이 천정을 향해 올라왔다. 농촌교당 교무들이 영산에서 훈련을 하던 때라 취재온 원불교신문사 박달식 교무에게 말했다.

"사장님 이리로 오셔. 여기 바닥 올라온 사진 좀 찍읍시다. 신문에 내게."

사진 찍고 있는데 당시 교정원장인 경산종법사가 와서 "지금 뭐해?"하고 물었다. 그는 "신문에다 대서특필하려고 사진 찍고 있습니다" 했더니 "가만 있어봐"하고 함께 왔던 당시 기획실장인 김도심 교무를 불렀다.

경산종법사는 "내가 이야기 했으니까 한달안에 아무소리 없으면 대서특필해"라 했다. 이후 서신교당 한길상 교도가 와서 영모전 바닥과 옛날식 불단을 새로 했다. 삼밭재 기와부터 영산의 중요 사적지들의 하자를 발견하고 고친 것만 열 채가 넘었다.

▲ 구호동 집터를 매입했을 때 법타원 김이현 종사는 "몇십 년 두고도 못샀을 땅"이라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토지문제 정리

영산의 큰 문제는 또 있었다. 영산 1차방언 때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줬던 경작권 문제였다. 20년 넘도록 관리를 제대로 안하다보니 동네 사람들이 소유권을 주장해도 그대로 넘어갈 지경이 됐다. 그런데 묘하게도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동네사람들이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경작권을 모두 팔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총부에 알렸고 수도원 원로들이 힘을 합쳐 경작권을 모두 사들였다. 제3 방언공사나 다름없었다. 소유권 분쟁이 말끔히 해결된 것이다. 농약 규제도 할 수 있게 돼 현재 유기농 농업이 가능하도록 토대를 마련했다.

이 밖에도 구호동 집터, 이씨제각, 창립관 앞 주차장 등 성적지 13개 땅도 총부가 매입할 수 있도록 주도적 역할을 했다. 모두 동네 사람의 땅이었는데, 그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춘타원 이영남 할머니가 연결해줘서 큰 거부감 없이 성사된 일이다.

"영산성지 초기시절부터 계셨던 분이라 그 할머니보다 이 곳 사정을 잘 아는 분이 없어. 우리가 영산에 살 때 우리 어머니하고도 사셨으니까 나를 다 도와주신 거여."

법타원 김이현 종사도 그가 구호동 집터를 샀을 때 "몇십 년을 두고 살려고 해도 못살 땅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냐? 니가 영산성지 정리하러 왔나보다"고 매우 좋아했다. 그는 영광군에서 무엇을 해준다고 해도 함부로 받지 않았다. 공짜돈이라고 받을 때 처음에는 좋을 것 같지만 외려 청정한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꼭 할 일이 아닌데 욕심나서 돈 갖다 붙이면 큰일 나. 영산 구수산은 그대로 두는 게 좋은 공원이 되는 거야."

하루라도 철 들어야

그는 마지막으로 후진들에게 당부했다.

"퇴임하고 나서 생각하니까 빨리 철드는 사람이 주인이더라. 하루라도 빨리 철들어서 전무출신하면 이것은 공을 위해서나 개인을 위해서나 홍복이지. 후진들은 대종사님 살림살이가 어떤 살림살이인지 확실히 잡아야 돼. 항마위는 자기만 잘해서 백전백승하면 되는데, 대종사님처럼 모두를 다 품는 살림을 하려면 출가위에 표준을 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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