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영화 '그레이트 디베이터스'를 보면, 미국 역사에서 흑인차별 철폐를 위해 약자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왔는지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차별받는 흑인들의 토론팀이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인 하버드대학에서 백인토론팀을 이기는 것이다.

먼저 '시민 불복종은 정의를 향한 싸움에 도덕적 무기이다'라는 토론 주제가 제시된다. 흑인인 파머는 1919년 암리차르 대학살을 통해 인도에서 간디가 아힘사(비폭력, 불살생)야말로 도덕의 승리라고 한 것을 인용한다. 그러나 백인측은 1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수백 만 명의 병사들처럼 폭력을 써서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도덕적임을 주장한다. 마침내 파머는 재판도 없이 백인들이 흑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것을 고백한다. 그 폭도들이 범죄자임에도 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흑인이 주택 공급을 거부당할 때도 학교와 병원에서도 쫓겨날 때도 법은 없었다고 한다. 성 어거스틴이 "공정하지 못한 법은 법이 아니다"고 한 것을 인용하여 저항할 의무가 있으며, "이때는 누구라도 폭력보다는 시민불복종을 택할 것이다"고 말하여 마침내 승리로 이끈다.

지자본위에서는 과거 불합리한 차별 제도를, 반상(班常), 적서(嫡庶), 노소, 남녀, 종족의 차별을 들고 있다. 이로 인해 흑인들처럼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약자들이 고통 속에 살아왔을까. 여성의 참정권이 20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이제는 많은 부분에서 차별은 소멸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관습의 벽은 두꺼워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차별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오늘날에는 정치, 경제적 차별은 물론 신분, 인종, 성, 소수자, 지역 등 다양한 문화적 측면에서의 불평등으로 보고 있다. 사요의 근본은 모든 측면의 인간평등을 그 핵심 가치로 삼고, 이와 같이 차별을 철폐하여 참된 평등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자력양성의 강령에서 자력으로 의무와 책임을 다 하는 동시에 힘 미치는 대로 자력 없는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뜻이다.

자력양성의 교의형성사에는 평등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1929년에는 부부권리동일, 1932년에는 남녀권리동일이었던 것이 1943년 〈불교정전〉에서 지금의 의미로 확정되었다. 그 근본이 평등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평등의 사전적 의미는 권리, 의무, 자격 등이 모두에게 고르게 돌아가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 기회와 조건의 평등을 추가하고 있다. 계급이 다른 출발선에서, 다른 삶의 환경에서 경쟁한다면 이것은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다. 오늘날에는 한 발 더 나아가 차별받고 있는 집단이나 사회를 우선함으로써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적극적인 사회정책을 펼치고 있다.

자력양성은 개인의 노력은 물론 사회가 함께 도와야 한다. 결국 일원상 진리의 진공적 측면에서 차별 없는 모든 존재의 평등의 당위성을 실현하고, 무한평등한 우리 불성의현실구현을 위해서는 자타력의 원만한 조화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불토낙원으로 인도하자는 것이 자력양성은 물론 사요 전체의 근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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