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기름 팔고 모시옷 만들어 교당 건물 마련
네팔·아프리카 해외교화 위해 아낌없는 후원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부산 서면교당에 다니던 그가 하동의 한적한 시골집으로 이사 온 사연이 있을 터, 그와의 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영감님(임형국 교도)이 몸이 아파 이곳으로 들어왔어요. 그때가 원기89년(2004)이었을 텐데, 1년 정도 이 시골집에서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끼니 때를 잊지 않고 챙겨주던, 자상했던 영감님'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그 막막한 그리움이 그의 시집에 온전히 담겨 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그는 이곳에서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는 세월을 살고 있다.

"23살에 결혼을 하고 부산으로 이사와 세를 얻어서 살았어요. 그때 주인집이 원불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주인집(정은하 교도)에서 교당에 가면 좋다고 자꾸 '갑시다 갑시다' 그래요." 그렇게 '주인집 체면 생각해서' 다니게 된 서면교당,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그때 설교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는 그. 처처불상, 사사불공에 대한 법문은 그에게 작은 울림이 됐다.

"법문이 참 좋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속세에 나오면 또 복잡하잖아요. 먹고 살아야 하고. 어느 날은 바빠서 못나가겠다고 변명도 하고, 어느 날은 쉬고 싶은 맘에 주인집 몰래 숨어있기도 하고…(웃음)"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듣게 된 법문은 큰 울림이 됐고, 이후 그는 '교당에 오지 말라고 해도 가게 됐다'고 말했다.

원기65년 개금교당(서면교당 연원) 봉불의 중심축에 그가 있다. "당시 전세로 교당을 얻었어요. 1년 살면 전셋값이 오르니, 옷장사도 하고, 참기름도 팔고, 모시옷도 만들어 팔아서 전셋값 충당하면서 살았지요. 법신불 모시고 3번 이사를 다니다가 건물을 샀어요." 당시 간난했던 시절을 기억해내는 그. '전기세 아끼느라 촛불아래에서 경전을 읽고, 겨울에도 냉방에서 지내던 교무님'을 생각하면, 그는 지금도 미안함에 얼굴이 붉어진다.

"교당 건물을 사긴 했는데 대출 빚도 갚아야 하니 32개월짜리 계를 만들어보자 싶었어요. 당시 100만원짜리 계를 두 개나 열어준 교도님이 계세요. 제가 3개를 넣고, 그렇게 5개를 짜서 곗돈을 부었어요. 곗돈 넣을 날짜에 맞추느라 때로는 이웃에 빌리기도 하고. 김장사, 기름장사, 비누장사 안 해본 장사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그는 스스로 계주가 돼서, 교당 대출 빚도 청산하고 여유자금도 어느 정도 장만했다. 지금은 옛 이야기로 들려질 만큼, 그에게도 아련한 추억이 됐다.

"5년 전에 저도 큰 수술을 받아야 했어요. 지난해에도 5시간에 걸친 시술을 받고나니 부쩍 늙어 보이네요(웃음). 건강이 나빠진 이후론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었지요. 정리를 좀 하고 싶었다고 할까." 말끝을 흐리는 그다.

▲ 아프리카에서 보낸 감사인형과 백 교도 시집.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그가 선택한 것은 불사였다. 무엇보다 값진 불사는 아프리카 김혜심 교무님께 전달한 2천만원.

"인견으로 바지를 만들어서 팔았어요. 좌선할 때 입어도 좋고, 여름에는 시원해서 교무님들이 편하게 입을 수 있거든요. 한 장에 2만원씩, 천 장을 만들면 2천만원을 마련할 수 있겠다 싶었지요." 하루에 3장씩, 그렇게 1년 안에 천 장을 만들겠다 작정하고 시작한 일을 3년 만에 마쳤다. 건강이 그를 놓아두지 않았지만, 작업하는 대로 모아진 기금을 보낼 때마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부산에 있는 아파트도 처분했다. 그렇게 마련된 목돈은 올해 네팔 우물파기지원사업을 비롯해 아프리카 해외교화를 위한 후원금으로 보냈다. 서면교당 건축기금까지 포함하면 1억 8천여 만원을 희사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대종사님 법이 세계로 전해져야지요." 그가 아낌없이 해외교화를 지원하는 이유다. 인터뷰 내내 수줍은 웃음을 보이는 그의 모습이 곱고 고왔다.

[2017년 10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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