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간난한 초기교단에 큰 힘이 되어 소태산 대종사 보필의 상수제자이자 수달장자로 알려진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헌신봉공한 삶을 유성교당 민성효 교무가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팔타원은 1903년 7월 황해도 연안에서 부친 황원준과 모친 송춘성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찍이 사기그릇 사업 등으로 자수성가했고, 연안 봉남학교 2대 교장을 지낸 교육가이기도 했다. 또 매해 겨울마다 불우한 이웃들에게 새 옷을 사 입히고 솥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밤에 솥을 지게로 져다 주며 '남을 도와주는 것이 인생의 도리'라는 아버지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게 된다. 그는 길림성립여자사범학교에 들어가 유치원 교사로, 일본계 정토종불교재단에서 경영하는 화광교원에 들어가 화광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면서 훗날 고아원설립과 학교교육에 크게 헌신하게 될 인연을 쌓아갔다.

이후 25세 되던 해 강익하(康益夏, 1896~1956)선생을 만나 결혼하는데, 남편이 내연녀를 숨기고 있는 게 들통나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고, 무언가 결단을 내기 위해 아들 강필국과 금강산 여행을 갔다가 불법연구회 교도인 이천륜을 만나게 된다.

이천륜은 "세상 일이란 모두가 전생의 인연이니 부처님 뜻에 따르라"는 말과 내금강 마하연 선원에서 만난 주지스님에게 받은 <초발심수행장>에서 '세상의 모든 낙 뒤에는 고해가 있는데 무엇을 탐할 것이며 어찌 불도를 닦지 않으리오(世樂後苦 何貪善哉 何不修哉)' 구절에서 인생의 이치를 크게 깨닫고, 원기21년 10월15일 경성 돈암리에 있는 불법연구회에 입교하면서 황정신행(黃淨信行)이라는 법명을 받는다.

그가 34세 되던 원기23년 4월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경성회관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뤄진다. 겁 없이 들어왔던 팔타원은 대종사의 위풍에 눌려 완전히 압도됐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소태산은 "당신 같은 사람이 날 보러 어찌 왔느냐?" 묻자, "선생님께서 도가 높으시다 하여 도를 듣고자 왔습니다" 대답했다. 그 자리에서 소태산 법문을 받든 팔타원은 30년 동안 들어온 예수교 목사의 말과는 달리 현세에서 희망이 있음을 느꼈다. 법문을 듣고 공부에 발심이 생겨 이완철 교무에게 <금강경> 강의를 받고, 총부 동하선도 나면서 신심과 공부심이 깊어갔다. 이후 팔타원은 중앙총부와 서울교당 유지발전은 물론 창업기 갖가지 교단 경제난을 극복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다.

구타원 이공주 종사는 "교단에 나보다 사업에 장한 사람이 있는데 팔타원이다. 나보다 늦게 귀의하였으나 사업은 나보다 더 많이 했다"고 말했고, 주산 송도성 종사는 "교단에 경제적 어려운 일만 있으면 찾아간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면 '무슨 어려운 일이 있군요' 하면서 돈통에 손을 넣어 집히는 대로 세어 보지도 않고 주었다"고 회상했다.

팔타원은 60여 년간 한국보육원을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보살피는 보육사업에 헌신했으며, 사회복지법인 창필재단을 설립하고 휘경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혼신을 다했다. 또 구석구석에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교단의 유지발전에 온 정성을 다바쳐 온 그는 원기34년 재가로는 최초로 정수위단원에 피선됐으며 원기76년 종사 법훈을 수훈했다.

사회적으로도 1954년 건국10주년 공로상을 시작으로 대통령공익포상, 사회사업공로상, 국민훈장동백장, 교육공로표창장, 제28회 소파상, UN공인 경희대 에머럴드상 등을 수상했고, 제3회 인간상록수로도 추대되는 등 교단 내외의 빛나는 공덕을 쌓았다.

민 교무는 "팔타원 종사는 교단 창립기 간고한 시절에 막대한 정재를 희사해 대종사가 포부와 경륜을 펴는 데 큰 힘이 됐고, <금강경> 도리를 깨쳐 무상보시의 전범이 된 보살이다"며 "특히 그는 교단 안의 인물만이 아니라 험난한 한국역사 속에서 타자녀교육, 무아봉공, 처처불상 사사불공 정신을 몸으로 보여준 국가적 세계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길이 모셔야 할 귀한 선진이다"고 발표했다.

[2017년 10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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