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문을 범하는자 나를 멀리하는 자이다
분별없는 본래 성품으로 좋은습관 길들이라

佛言- 弟子- 離吾數千里라도 意念吾戒하면 必得道요 在吾左右하야 雖常見吾라도 不順吾戒하면 終不得道니라
"부처님 말씀하시되 너희들 중에 나를 떠나서 수천 리 밖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내가 준 계문을 잘 지켜서 계행을 청정히 하면 이는 곧 나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라 반드시 도를 얻을 것이요 비록 나의 좌우에 있어서 항시 나를 보고 같이 있다 할지라도 계행이 바르지 못하면 이는 곧 나를 멀리하는 사람이라 마침내 도를 얻지 못하리라."

 
〈사십이장경〉 37장의 법문은 비록 몸은 부처님 곁에 있지 않아도 계행을 청정히 지키는 사람은 도를 깨닫게 되지만, 몸이 부처님과 가까이 있다 하여도 계행이 바르지 못하면 결국 도를 깨치지 못한다는 의미의 법문이다. 중요한 것은 제자가 스승님의 뜻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지 가까이 모시고 있느냐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씀이다.

제자 이오수천리(弟子 離吾數千里)는 제자가 나로부터 수천리 떨어져 있다는 말씀으로 어떠한 이유이던지 간에 제자와 스승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을 가상으로 전제하신 것이다.
의념오계 필득도(意念吾戒 必得道)는 내가 준 계문을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도를 깨칠 것이다는 말씀이다. 물리적인 거리는 떨어져 있다하여도 부처님께서 내려주신 계문을 잊지 않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제자는 반드시 결과를 볼 것이라는 의미이다.

재오좌우 수상견오(在吾左右 雖常見吾)는 나의 좌우에 있어 늘 나를 본다는 말씀이다. 부처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늘 색신을 모시고 살면서 가까이 한다는 의미이다. 대종사도 "사람이 부처님의 공양하시고 남은 밥을 먹는 것"을 해설 하실 때 "자연히 보는 것은 부처님의 행동이요, 듣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깨닫는 것은 부처님의 정법이요, 물드는 것은 부처님의 습관이 되어, 이에 따라 천도 받기도 쉽게 되고 성불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듯이 가까이 하는 제자가 스승의 뜻을 제일 잘 이해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불순오계 종부득도(不順吾戒 終不得道)는 나의 계문을 지키지 않는다면 마침내 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는 말씀이다. 아무리 곁에 가까이 있어도 스승님의 뜻을 받들어 드리지 않고 몸만 봉양한다면 이는 스승님을 참으로 모시는 제자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소태산 대종사도 "계문을 범하는 자는 곧 나를 멀리한 자요, 계문을 잘 지키는 사람은 곧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니 삼십계문을 특히 잘 지키라"(〈대종경선외록〉 유시계후장 20절)하면서 "계문을 함부로 범하는 사람은 회상의 파괴자"(〈대종경〉 교단품 33장)라고 까지 말했다.

집에서도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자녀는 부모님의 육신을 잘 봉양하는 것이 그 기본이 될 것이다. 즉 멀리있는 자녀보다는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불편하지 않게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부모로써는 육신의 봉양도 중요하지만 미처 실현하지 못한 뜻을 알아 마음을 살피고 미완의 사업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자녀가 더 고맙고 소중하지 않을까? 〈정전〉 부모보은의 조목에 "부모가 무자력할 경우에는 힘 미치는 대로 심지(心志)의 안락과 육체의 봉양을 드릴 것이요"라는 항목이 있다. 즉,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육체적인 봉양만이 아니라 심지의 안락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스승을 모시는 마음가짐도 같은 것이다. 스승을 가까운 곳에서 잘 모시고 함께 생활하는 것도 스승에게 중요한 일이지만, 멀리 떨어진 제자라도 자신이 염원하는 일들을 실천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것들을 소중히 여겨 착실히 공부하여 실력을 쌓아간다면 스승은 이런 제자를 더욱 사랑하지 않을까? 정산종사도 멀리 떨어져 있는 제자에게 "몸은 산천의 격활(隔闊)에 있으나 마음은 법회의 일석(一席)에 있으며, 일은 백천만 가지가 비록 다르나 정신은 신성 일념에 근원하여 부지런히 부지런히 잘 힘쓰면 이것이 나를 떠나지 않는 공부요 바로 부처의 경계에 오르는 도가 되나니라"고 말했다.(〈정산종사법어〉 응기편 58장)

계문이란 마치 자동차의 안전벨트와 같다. 매번 차를 운전할 때 마다 벨트를 매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지만 사고가 났을 때 나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은 바로 안전벨트이다. 이처럼 지키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을 수 있지만 그것을 습관화하여 몸에 익숙해질 때 까지 유념을 한다면 그것이 결국은 나의 앞길에 생길 수 있는 마장을 막아주고 나의 전로를 열어주는 고마운 것이 계문이다.

원불교에서는 계문과 더불어 솔성요론을 가르치고 있다. 계문이 잘못된 행동을 방지하고 악을 범하지 않게 하는 공부라면, 솔성요론은 분별이 없는 본래 청정한 성품을 잘 계발하여 좋은 습관을 길들여 결국 부처가 되게 하는 공부를 말한다. 종교라는 이름아래 종교 신자의 잘못된 점을 자꾸 지적하여 흥미를 떨어뜨려 주눅들게 하기 보다는 실천할 수 있는 일을 권장하여 자신감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도 새 종교의 실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법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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