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지원 교도/광주전남교구 서광주교당
행복한 가정 이루고 싶어 찾아간 원불교
나의 조물주는 나, 일체생령 각각 조물주
다른 사람 바루려거든 먼저 나부터 바뤄야

원기96년 2월6일은 내가 서광주교당을 처음 출석한 날이다. 그날 아침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교당을 향하여 집을 나선 지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다. 잘 굴러가던 차가 도로 중앙에 멈춰 섰다. 나는 "그래 하나님아버지가 자녀의 일을 모르실 리가 없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확실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뒤, 누구와 동행한 것도 아닌데 나는 서광주교당 법당에 앉아 있었다.

절하는 모습, 독경, 목탁소리가 너무나 낯설고 어색해서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설교에 집중했다. 그러자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생각한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진정이 됐다.  26년 동안이나 기독교 신앙을 하던 내가 원불교를 찾아온 까닭이 있다. 남편과 마음이 하나 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현모양처를 꿈꾸며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을 원했다.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 기뻤다. 왜냐하면 결혼만 하면 남편이 내 인생을 완벽하게 책임져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정말 무서운 결과를 낳았다. 사사건건 불협화음이 나고, 남편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는 "그래 나는 세상 사람과는 다른 신앙인인데 남편을 이해해주고 용서해 줘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한 3일이 지나면 어김없이 남편에 대한 온갖 원망과 미움이 일어났다.

하루는 화가 난 얼굴로 그동안 저질렀던 잘못을 하나도 빠짐없이 쏟아냈다. 남편도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사가 따로 없고 자기에게는 악마가 따로 없는 이중인격자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말도 아닌데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부끄럽고 얼마나 자존심 상했는지 모른다. 그때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다투면서 살아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언제 어디서나 함께한다던 그 분은 불러도 대답이 없고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신앙의 대상을 잃어버린 순간 혼돈과 방황 그리고 삶에 대한 회의까지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을 밖에서 구하고 찾는 문제가 아니라 자책하며 괴로워할 때마다 조용히 나를 위로하며 일으켜 세워주던 법문이 있었다.

"귀하의 조물주는 귀하요, 나의 조물주는 곧 나며, 일체생령이 각각 자기가 자기의 조물주이니라." 그것은 나의 큰 구원이며 큰 복음이었다. 다툼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서 찾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나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깨닫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화복 간에 내가 지은 일은 반드시 내가 받는 것이라.' 내가 짓고 내가 받고 내가 책임진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과의 갈등은 결국 기독교신앙을 점검하게 했고, 수많은 갈등과 괴로움은 지금의 참 나를 찾게 하고, 원불교와의 인연을 맺어 주었다.

남편은 분명 내 마음 쓰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남편이 싫어하는 잔소리 대신,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심사숙고 하고 꼭 하고 싶은 말도 줄이고 그쳐서 정성을 다해 서재원(남편) 생불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대종사께서는 '내가 못 당할 일은 남도 못 당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바루고자 하거든 먼저 나를 바루라'고 했다.

남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길은 교도님들과 하나 되는 길이며 나라가 하나 되고 세계가 하나 되고 온 우주가 하나 되는 길이었다. 남편은 못난 자기를 만나 마음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며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작은 반지 하나를 선물해 주었다. 나는 반지도 고마운데 내 평생의 소원 하나가 있다고 말했다.

연말에나 교당 가겠다고 매번 미루기만 하던 남편과 그 해 8월 하섬훈련원으로 교도훈련을 갔다. 아들에게도 "엄마가 꼭 가보고 싶은 여행이 있다"고 부탁했더니 동행해 주었다. 언젠가 내 아들이 이 길을 앞장설 날을 간절히 염원하면서 아들 팔짱을 끼고 익산 총부를 걷는데 너무나 행복했다. 원불교 개종을 걱정했던 딸아이는 "이제 엄마는 마음공부 그만하셔도 될 것 같다"며 나의 공부실력을 인정해주었다.

나는 평소 책을 좋아해서 사경이 대체로 잘 맞는 편이었다. 그동안 나의 허물을 고치는 데는 후하고 남의 허물을 고치는 데는 엄하게 대했으니 까닭 없이 미움의 대상이었던 넷째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허풍쟁이 언니가 아니라 과장이 조금 심한 언니구나, 이해하면서 오랫동안 단절하고 살았던 언니집을 찾아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손을 꼭 잡았다.

가끔 가족들 만나러 서울에 가면 그곳에서도 일요법회 빠지지 않고 인근의 공항교당에 꼭 참석한다. 내 소중한 인연들이 이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그날을 소원하면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교당 안에서 이 법을 실천하고 발전시킬 막중한 중간 소임에 동참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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