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문화순례

▲ 대산종사가 신도안에 머무를 때 예비교무들이 방문해 노래공양을 올렸다.

신도안(新都安)은 소태산 대종사가 두 차례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원기21년(1936) 4월, 십여 명의 제자들과 같이 신도안을 방문한 대종사는 "이곳이 천여래 만보살이 날 곳이다"며 수양 도량을 만들라고 당부했다.(원기28년에 또 한 차례 방문했다고 전해지나 확인할 길이 없다.)

소태산 대종사가 신도안에 수양 도량을 세우라는 뜻을 받들어 정산종사는 신도안에 수양 도량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산종사는 생전에 한번도 신도안에 다녀온 적이 없었다. 한번은 정산종사가 지맥을 잘 보는 충산 정일지를 불러 신도안을 다녀오게 했다.

정일지는 신도안을 "농사도 안되고, 아이구 천하에 빈 터입니다"라고 말하자 정산종사가 "충산이 뭘 아신다고 그런 말을 하시오?"하며 화를 냈다고 전한다. 훗날 정일지는 지인들에게 "내가 선법사님(정산종사) 영전에 잘못을 사뢸 일이 있다. 내가 계룡산을 올라가 보니 신도안은 천하의 귀 터이더라. 우리나라 어디를 가 봐도 이보다 나은 귀 터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도안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면서 도읍을 옮기려 한 사건에서 그 지명이 생기게 됐다. 예부터 역성혁명의 임금은 반드시 그 도읍을 옮겼다는 신념 아래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 다음해에 계룡산 신도읍 설이 등장해 태조는 왕사로 모시던 무학대사와 중신들을 데리고 계룡산을 찾게 된다. 계룡산이 명산이며 길지고 명당인지라 빨리 개성을 떠나고 싶었던 태조는 도성과 궁궐 건설 착수에 들어가게 됐으나, 공사 착수 10개월 만에 다시 멈추게 된다.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며, 계룡산이 도성으로서 길복이 있는 땅이 아니라는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말에 신도읍 건설이 중지되고 신도안이라는 지명만 남게 된다. 대궐을 지으려 공사가 진행됐던 곳은 대궐터라 불리고 그곳에 불종불박(佛宗佛朴.새로운 불교의 종주(宗主)는 박씨가 된다는 의미로 언제 누가 써놓았는지 알 수 없는 일종의 비결 문구)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문구를 보고 "무학대사가 장난을 쳤구만"이라 말했다.

원기22년(1937) 봄에 불법연구회는 신도안에 출장소 간판이라도 붙일 계획이었으나 뜻과 같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동년 8월에 남선리 이원리화의 집에 정식 출장소 간판을 걸고 사랑방에서 4년 동안 예회를 보게 됐다. 원기26년 5월 단가 5칸을 준공해 불법연구회 남선지부로 승격됐다.(현 연산교당의 모체) 최초로 신도안 대궐터 기지를 매입한 것은 원기43년 4월 정산종사가 당시 성정철 재무부장에게 "신도안 불종불박 터를 사도록 하라"는 하명에서 시작됐다. 성정철 재무부장은 돈이 없어 살 수 없다고 고하자 "내게 산다고 말하게! 사는 수가 있으니. 보화당 하고 학교에 가보게"라고 정산종사가 말했다. 정산종사의 말씀대로 원광대학과 보화당에 가서 그 이야기를 하니 두 말 않고 돈을 내줬다고 한다. 성정철은 후에 "성현이 하시는 일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불가하다 했으니 내가 바보였다. 얼마나 답답하셨겠는가"라고 회고했다.

원기44년 10월 신도안 대궐터의 불종불박 바위 뒤에 있는 초가 1동을 매입했다. 그리고 대궐터에서 2km 떨어져 있는 남선교당을 이곳으로 옮기도록 해 원기45년 9월1일 신도교당이 설립됐다. 원기46년 8월15일 대구교도 김지원행의 희사로 신도안에 대지 3,712㎡(1,123평)을 매입했다. 당시 남선교당에 주재하던 심익순 교무는 신도교당 교무로 전임됐다.

▲ 신도안 대궐터의 불종불박 바위. 익산성지 대종사 성비옆 바위는 재현한 것이다.
정산종사 유시 '신도안으로 가라'

신도안은 정산종사의 특별한 관심에 의해 교단의 중요 개척지로 떠올라 있었다. 원기46년(1961) 5월 대산종사를 비롯해 이공주, 성정철, 정광훈, 이철행 등 교단 주요 간부가 다녀갔다. 총부 어른들 중 신도안에 다녀가지 않은 사람은 정산종사와 이동진화 둘 뿐이었다. 정산종사는 한번도 다녀온적이 없는 신도안의 고금 전후사를 꿰뚫고 있었다.

동년 9월25일 정산종사의 서울대학병원입원소식을 듣고 상경한 대산종사에게 정산종사는 "지체 말고 어서 신도안으로 들어가거라"고 하명한다. 정산종사의 수술경과를 보기 전에 대산종사 일행은 신도안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수술이 끝난 뒤에 다시 정산종사가 "어서 가 신도안에 터 잡아라"는 하명을 받고서야 계룡산으로 향했다.

원기47년(1962) 1월22일 정산종사 대중에게 삼동윤리를 대산종사에게 설명하게 한 후 "물을 말이 있으면 물어 보라" 하자 시자가 "삼동윤리의 요지로써 게송을 삼아오리까?" 하고 물었다. 정산종사는 "그리하라"고 답하고, 이어 "신도안은 어떻게 하오리까"묻자 "크게, 크게"라고 유시했다.

1월24일 정산종사가 열반하고, 1월31일 수위단회에서 3대 종법사로 수위단회 중앙인 대산 김대거 종법사가 추대됐다. 동년 4월, 신도교당 2대 교무로 동산 이병은, 순교로 이유관이 발령됐다. 대산종사는 종법사 취임 후 5년간 주로 신도안에 주석했다. 3월 총회 때나 대재 때 총부에서 주재하고 여름과 겨울은 신도안에 머물렀다.

▲ 신도안에서 대산종사가 주재할 때 종법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정산종사의 유촉을 생각하며 대산종사는 이 건물을 보은전(報恩殿)이라 이름했다.
대산종사가 신도안에 있을 때는 숙소가 부족해 내왕객들을 통제했다. 숙소라곤 불종불박 바위 옆에 3칸 오두막 하나에 작은 방 3칸뿐인데, 이것이 새 지도부 법당이요 또 종법실로 이용됐다. 대산종사는 이 오두막집을 '보은전(報恩殿)'이라 이름했다. 정산종사의 유촉을 생각하며 붙인 옥호였다. 종법사가 신도안의 옹색한 오두막집에서 계속 주석하자 총부에서 시비가 없지 않았다. 대산종사는 "내가 종법사 자리에 소홀하더라도 선법사님(정산종사) 부촉을 저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신도안에 손님이 오면 이병은 교무는 한뎃잠을 잤다. 새벽에 손님이 일어나 밖에 나와서 보면 이병은 교무는 바위 위에서 자고 있었다. 여름에 교도들이 많이 찾아올 때는 신도안 임원들은 숫제 노숙을 하다시피 했다. 지부와 법무실 식구까지 예닐곱 명이 판판한 주춧돌 바위 하나씩을 차지하고 돌잠을 자다가 떨어지기도 해 땅바닥에 멍석을 깔고 자기도 했다. 매양 이렇게 지낼 수 없어 하루는 대산종사가 "저기 변소간에 방을 들여라. 내가 거기 있겠다"고 명했다. 이병은 교무는 엄동 추위에 찬물 맨발로 흙을 이겨 변소를 고쳐 방을 만들고, 아궁이를 냈다가 고치기를 수차례 거듭해 구들 놓는 전문가가 됐다고 한다. 대산종사는 "동산은 구정선사 보다 더 큰 신심을 가졌다"고 그의 신심을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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