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공현 교무/은덕문화원

[원불교신문=이공현 교무] 존 맥아더, '21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충고했다. "한국 교회는 이미 끝난 것 같다." ▷한국은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 갑자기 교회가 커졌다. ▷사회적으로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교회는 힘과 권위만 갖게 됐다. ▷거대한 빌딩(empire building)이 너무 많다. ▷목회자의 자아가 교회 크기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는 성경을 잃었다. 그의 진단이 한국교회만의 몫일까. 오늘의 원불교도 유감이다.

"성서를 머리에 꽂아라." 종교개혁자 루터는 직설적이었다. 그는 구체적이고 단호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그리스도교 10월은 분주했다. 그들이 펼치는 생명력 있는 '작은 교회 한마당'이 특별하다. 철거민 곁을 지키는 신학대생들의 현장교회, 카페교회, DMZ 비무장지대 방송교회 등 상상력을 파괴한 교화전략이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시대의 종교개혁을 모색하고 있다. 공감되는 고민이다.
한국교회의 돌파구는 작은 교회다. 그들이 캐낸 오늘의 종교 양태다. 3천억 원 이상의 대형교회가 세워지는 현실과 범법행위로 이어지는 목회자의 신뢰도에 맥수지탄(麥秀之嘆)이 따랐다. 교회가 높고 웅장한 건물로 섬처럼 군림하지 말자. 지역 속으로 파고들어가 종교본연의 공동체가 되자. 피를 토하는 망양지탄이다. 맥락에 탈 성직·탈 성별·탈 성장이 있다. 그들의 분발유위(奮發有爲)의 결단에 원불교의 종교적인 과제가 보인다.

우리시대의 종교는 상호의존적 관계 회복이 과제다. 따라서 다양성과 모성성이 충만한 종교문화라야 답이다. 나의 종교적 사명이 법신불 사은의 은혜로 연동되어야 한다. 혹자는 우리시대의 종교현실을 탄식한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에 산다고. 언제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의 늪에서 한숨과 좌절만 할 것인가.

원불교 역사는 환하다. 희망이다. 지금부터 100년 전, 별빛이 총총한 그 시절부터 원불교는 우리시대를 위한 정신적 기초를 다지는 신앙운동에 돌입했다. ▷지금 물질문명은 그 세력이 날로 융성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은 날로 쇠약하다. ▷개인ㆍ가정ㆍ사회ㆍ국가가 모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창생의 도탄이 장차 한이 없게 될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사자후다. ▷그대들은 각자의 마음에 능히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음을 알라 ▷각자의 몸에 또한 창생을 제도할 책임이 있음을 항상 명심하라.

내년은 법인성사 100년의 해다. 법인성사는 종교개혁의 꽃이다. 과거의 종교는 권력과 유착함으로써 거대해졌다. 제국주의를 보필하는 역할로써 세계적인 규모라는 불명예를 누렸다. 피를 부른 종교사로 운신의 폭이 좁다. 그래서 역사는 종교가 권력과 결탁할 때 굴절되는 말로를 경고한다. 해법이 사무여한이다. 죽지 않고 죽기로써 죽을힘을 다해 이뤄내는 신앙 기적. 이것이 곧 천의다. 만사 만리의 공도자 탄생의 서막이다.

법인성사 시작은 탈 성직이다. 법인기도에는 출가와 재가, 그리고 성별, 적서의 차별도 없었다. 천여래 만보살의 시작은 오직 지극한 기도정성이었다. 원불교에서 법신불 사은의 절대 위력을 체험하지 못한 이는 신앙적 미숙아다. 전날의 습관과 애착, 오욕에 사로잡힌 중생의 분별서원은 가짜다. 진리의 이방인이다. 원불교 신앙인의 위력을 결코 모른다. 사무여한의 대오각성(大悟覺醒)은 진리모심이 기본서원이다. 출발자세가 천신만고와 함지사지다. 죽음을 각오한 지극정성만이 공도의 주인을 탄생시킨다.

또한, 법인성사는 탈 성장이다. 작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절실한 종교. 그것이 아니다. 원불교는 작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지극한 종교다. 소태산 대종사는 금수저의 주인공, 해외유학파도 아니다. 전라남도 영광군 길용리 백수면의 가난한 범부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우주를 소유한 공인으로의 탄생이다. 그래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고난과 약함, 그리고 가난을 자처했다. 원불교가 세계주세교단이 되는 길은 권력과 결탁하는 길이 아니다. 깨달음의 공인과 공인이 연대하며 펼치는 일원화 세상이다. 우주를 소유한 공인들이 상호의존적 연대의 중심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이 원불교에 기대한다. 중생아. 중생아. "전날의 이름은 곧 세속의 이름이요 개인의 사사(私事) 이름이었던 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세계 공명(公名)인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

원불교는 개벽시대의 개혁된 종교다. 진정한 교도들이 필요하다. 법명으로 거듭난 공인 말이다.

[2017년 1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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