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중국의 선종이 발전한 이유 중 하나는 먼저 깨달은 사람을 선지식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수십 년 수행을 한 사람에 비해 오늘 입문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인천의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숱한 생 동안 굳건한 믿음과 수행으로 현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육조혜능은 이러한 역사 속의 표본이다. 문중, 동문, 동향 등 다양한 인간관계를 법위의 잣대로 삼을 수는 없다. 오늘날 목격하는 혈연, 학연, 지연 등의 동맹이 사회분열의 단초임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인정과 대의, 그리고 애지(愛知)의 마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선지식이라는 말은 나보다 앞선 사람을 말한다. 불문에서의 선지식은 나보다 먼저 입문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지혜와 영성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이 바로 스승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구도과정에서 그랬듯이 구도자들은 스승을 먼저 찾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학문의 세계는 이러한 과정이 사회적으로 체계화된 것이다. 지식인들 간의 뜨거운 논쟁은 학문을 발전시킨다. 토마스 쿤이 이야기한 패러다임은 과학적 지식이 새로운 도약을 위한 포용과 개척의 역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의 이면에 서있던 무명으로 점철된 과거를 돌이켜보면, 인간은 자신끼리도 차별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계급, 성별, 인종 등 상상가능한 모든 차별을 겪어왔으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또한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세계적 측면에서도 진행 중이다. 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지자본위는 인간 본성의 무차별 위에 지혜로운 차별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역사는 지자본위에 의해 이룩된 과정이다. 솔성의 도, 인사의 덕행, 정사(政事), 생활, 학문과 기술, 상식이 자신보다 위라면 스승으로 삼으라. 무엇이든 구하는 목적에 따라 자신보다 위에 있으면 배우라고 한다. 배움이야말로 이 생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하나의 대학이다. 삶의 현장은 스승을 모시고 배우는 인생의 초등학교로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어느 단계에 해당할 수 있다. 이번 생이 고등학교라면 다음 생은 대학교일 수 있다. 우리는 윤회 속에서 한 단계씩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다.

수도원의 원로선진 한 분이 외국어를 공부하고 계시기에 노년에 무슨 공부냐고 했다. 그러자 "이 생에 쌓아놓아야 다음 생에 더 잘 할 수 있을 것 아닌가"라고 말씀했다. 우문현답이었다. 인류문명은 이처럼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지적 호기심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망원경의 발달은 천국이 과연 지구밖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는,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의 활동 결과이다.

이제까지 마음이 상상해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명은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현실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비관과 절망으로 가득 찬 현실일지라도 이 상상력의 원동력인 마음의 지혜가 우리 자신의 운명과 인류사회를 바르게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 지혜를 먼저 밝힌 인류의 성현을 비롯하여 주위 선지식을 스승으로 모시고 산다면, 자신은 물론 이 사회와 세계를 낙원으로 이끌 대광명이 우리 앞에 무한히 펼쳐질 것이다.

[2017년 1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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