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세월이 지날수록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꾸미지 않고, 그름을 가리지 않으며, 평범하고 성스러운 것을 따지지 않음이야말로 어느 누구든 품고 살릴 수 있는 덕스러움의 토대가 된다. 간난한 생활 속에서도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마을 교화를 일궈내고, 순수함과 포근함으로 교도들을 이끌었던 귀타원 김도진(74·歸陀圓 金道振) 원로교무. 어려운 후진까지 조용히 품어 살렸던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선진의 법향(法香)이었다.

거룩한 회상에 참예한 행복

김 원로교무의 집안은 원래 불교를 믿었는데 아버지가 일찍 열반하셔서 홀어머니가 8남매를 다 길러냈다. 다행히 아들들이 의사로, 약사로 장성해 집안 형편은 좀 나은 편이었다. 영광에 살던 집은 2층이었는데, 필연인지 윗집은 원불교를 믿었다. 조대성 교무의 집이였다.

그가 초등학생 시절에 윗집 아주머니를 따라 신흥교당을 간 적이 있었다. 법회가 다 끝나고 산회가를 부르는데, ‘거룩한 회상에 참예한 행복~’ 하는 가사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확하고 와닿았다. 그 이후 알 수없는 그 느낌은 항상 따라다녔다. 그가 원불교를 믿으려하자 집에서는 반대했다. 어머니는 "할머니께서 불갑사에 불공을 드려서 아버지도 태어났고, 너도 태어났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럴 수 있냐"고 꾸지람만 하셨다. 그가 20세 되던 해 친구가 있는 광주교당에 놀러갔다. 오빠도 광주에서 병원을 하고 있었던 터라 핑계대기 좋았다.

"광주교당에 있는데 참 좋더라고. 그러다가 '이제는 더 이상 집에 머물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날부터 집을 안 가버렸지."

그날부터 그는 광주교당 공양원으로 간사근무를 시작했다. 광주에 사는 올케언니부터 난리가 났다. 결국 어머니가 광주로 올라오셨다. '너 죽고 나 죽자'고 했지만, 그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교당에 있으니 오빠는 계속 올케를 보냈다. 그는 '이러다가 잡혀가겠구나' 생각이 들자, 당시 광주교당 주임이었던 이성신 교무에게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사정했다. 마침 여수에 교당을 새로 낼 때라 김보현 교무와 함께 여수교당으로 갔다.

첫 학생교화

그곳에 가보니 부엌 하나 방 하나인 집이었다. 수돗물도 없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제법 모여들었다. 그때부터 학생교화도 하면서 부교무 역할도 열심히 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역전청소, 공원청소를 하니까 주변에서 원불교 평판이 좋았다. 그런데 고등학생들도 섞인 학생들이 "누나 누나~"하면서 따르고, 거침없이 손도 잡으려 하니 마음에 걸렸다. 교무님에게 상의드리니 "앞으로는 검은 몸빼에다가 검정고무신 신고, 될 수 있는대로 얼굴 내놓지 말고 다녀라"고 했다. 그후, 남자 와이셔츠 옷깃을 뜯어 입는 등 허름한 복장으로 다녔다. 화장품이 없어 교무님께 말씀드리니 물에다 설탕을 섞어줘서 얼굴에 발랐는데, 그는 그것이 원불교 화장품인 줄 알았다.

▲ 선원 생활 시절, 대산종법사를 모시고 정다운 도반들과 함께 찍은 사진 (대산종사 좌측).
역경 속에 뿌리내려

영산선원에 들어갈 때에도 어머니는 완강했다. "옷고름 짝 하나 해주지 마라. 나는 그런 자식 없다. 가려면 호적 파서 나가라"며 다른 형제들에게 엄포했다.

"집에서 그렇게 반대를 했으니 영산생활하는데 뿌리가 빨리 내린 것 같더라. 언니 결혼식 때인가 집에서 오라고 하셔. 안 잡을 테니까 와서 보기만 하라고. 그 전에 오빠에게 어찌나 혼났는지 집에 가서 오빠 신발이 있나 없나 보면서 집에 들어갔지."

그의 출가를 반대하는 집안 분위기는 외려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집에 어쩌다 한번씩 가야 할 때마다 그는 '내가 힘이 생겼겠는가' 성찰하며 정관평, 삼밭재, 대각지를 돌아다니며 기도 올렸다.

전화위복, 교화의 참 맛

무난히 고시를 마치고 교동교당에 첫 부임지로 발령받았다. 어느 날 감기가 들었는데 먹는 것이 부실하니 폐렴으로 진행됐다. 결국 6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사진을 찍어보니 폐에 구멍이 나 있었다. 어머니는 "남의 자식 일만 시키고 이럴 수 있냐"며 노발대발했다. 그때 정말 집에 잡혀 들어갈 뻔 했다. 그래서 추천교무인 김보현 교무가 있는 서울 제기교당으로 찾아갔다. 제기교당은 현재 안암교당 전신이다.

제기교당도 살림이 녹록치 않았다. 2평 남짓한 방에서 교무님과 생활했다. 이후 몇 번 이사를 다니면서 추천교무님 곁에서 부교무생활을 계속했다.

제기교당에는 중화동에서 다니는 교도 몇명이 있었는데, 교당이 너무 멀었다. 그래서 제기교당에서 중화교당을 새로 냈는데 그가 단독 교무로 발령받았다. 제기교당에 다녔던 교도들과 함께 서예, 꽃꽂이를 하면서 동네교화를 하다보니 20여 명이나 늘었다. 지금은 공릉교당과 통합돼 태릉교당이 됐지만, 당시 교도들은 스승의 날이 되면 여전히 꽃다발을 보내며 마음을 연하고 있다.

이후 경상도 수산선교소로 발령이 났다. 그가 4대째 교무로 발령받았지만, 교도는 거의 없었다. 동네에서는 서울사람이 새로왔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그가 교당과 동네 뒤뜰까지 청소하고 다니니 서울사람이 참 부지런하다는 평이 돌았다. 어느 날 교당에 어지러히 자라난 탱자나무를 베려는데 위에 사는 스님이 보기가 딱한지 대신 베어줬다. 동네사람들도 "그 교무님 참 좋은 것 같더라"며 청소를 도울 수 있도록 아이들을 전부 내보냈다. 위에 사는 스님도 자녀들을 여기 학생회로 보냈다. 영산·변산성지로 소풍 가는데 대형버스를 부를 정도였다. 남연성 교무가 당시 학생회를 다녔다.

일반교도도 차츰 늘어 수산교당을 지을려는 시기에 익산교당에 있던 오희원 교무가 "도와달라"며 같이 살길 몇 번이나 부탁하니 아쉬움을 뒤로하고 익산으로 향했다. 당시 전국에서 교도가 200명 넘게 나온 교당은 익산교당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젊은 교도들이 많지 않아 그는 '며느리, 딸 입교운동'을 펼쳤다. 젊은 교도 불공을 철저히 하면서 젊은 교도 불리기 운동을 했다. 하지만 큰 교당이다보니 천도재가 많았다.

"새벽 4시에 나오면 밤 11시에 방에 들어갈 정도야. 하루저녁에 천도법문을 4번씩이나 하기도 했어. 2년 지나니까 목이 가버렸지." 이후 박성석 교무를 모시고 1년 더 살았다. 최정신 교무를 이때 추천했다.

▲ 여수교당에서 추천교무 창타원 김보현 교무님과 함께.
적어도 삼대는 돼야

원기74년 거제교당에서는 천일기도 등 부지런한 교화활동으로 부임 3년만에 3층 집을 지었다. 이형권 교무가 당시 학생회 출신이다. 원기80년 중곡교당 부임해서 김형진 교무를 출가시켰다. 또 윤광일 교수가 당시 부회장이었는데, 실력이 뛰어남을 알아본 그는 법회마다 1문1답 강의를 시켜 교단 인재로 클 수 있게 했다. 그는 윤광일 교수가 아들에게 한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교당에서 소풍을 갔는데 아들을 데리고 왔더라고. '성민아, 나는 너를 데리고 왔다. 그러니 너는 네 아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하더라고. 너무 고마웠지. 그러면 삼대가 되는 거야. 장사도 삼대가 내려와야 뿌리를 내리는 것이고, 종교도 마찬가지야. 그때부터 삼대 가족을 찾아 교당에서 특상을 줬지."

원기86년 상주교당에서는 고상대 교도를 입교시켰는데, 현재 장남 고해민(원불교학과4학년), 차남 고해성(원불교학과1학년)이 출가했다. 원기92년 진안교당에서는 어려운 시기를 당면한 후진들을 조용히 품어안으며 회상에 마음의 뿌리가 잘 내리도록 보살폈다.

퇴임문화와 평상심

지금은 고창수도원에서 '건강한 퇴임자는 소모적인 생활보다 생산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기치아래 고추농사, 차밭관리 등 보은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원로들이 퇴임해서 노년을 가꿔 나갈 퇴임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인연따라 힘닿는대로 교화·교육·자선 방면에 봉사활동을 놓지 말아야 하고, 취미가 같은 사람끼리 할 수 있는 일도 만들어 갈 필요가 있어. 노후일수록 감사생활, 자력생활하면서 행복하게 생활하는 게 행복한 낙원 공동체 아니겠어."

평생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던 그는 퇴임 후에도 '평상심'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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