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소태산 대종사는 원불교의 사업목표를 교화·교육·자선으로 삼았다. 왜 교육과 자선을 교화와 함께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다양한 눈높이의 중생제도를 위한 또 다른 길을 설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문명은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나 국가, 혹은 민족들은 자신의 정체성 확립과 지속적 발전을 위해 교육을 핵심전략으로 삼았다. 교육은 새 세대가, 다가올 자신의 사회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산파의 역할을 한다. 마치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에게서 보듯 다음 세대에게 삶의 모든 지혜를 베푼다.

교육은, 〈순자〉(荀子)의 권학편에서 "남색물감은 쪽에서 얻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로 만들어졌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는 말에서 나온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잣대로 삼는다. 인간 진화의 입장에서 교육의 궁극적 의미는 이전 세대의 무조건적 희생을 통해 인류 전체의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동양의 교육은 인간을 무한히 긍정했다.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통달하는 문리(文理)가 그것이다. 대산종사는 김장생이 송익필로부터 〈사략〉(史略) 반 권만 배우고도 문리를 얻어 대문장가가 되었다고 늘 강조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미네르바 스쿨이야말로 인간성품의 문리적 능력에 기반하고 있다. 펜실베니아대학에 다녔던 벤 넬슨이 일반 대학교육의 한계를 절감하고 세운 대학이다. 인터넷을 통해 수업하며, 4년 동안 전 세계 7개 도시를 돈다. 모두 같은 수업을 듣는 첫 학년의 목표는, 비판과 상상력을 발휘해 생각하는 개인 능력과 더불어 상호교류와 원만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사회적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현실이 바로 수업 교재가 되며,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타자녀교육의 강령은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 교육기관을 확장하고, 두루 후진을 교육하여 세상의 문명을 촉진시켜 모두가 낙원의 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이제는 지구 전체가 학교가 된 미네르바 스쿨처럼 일상적인 교육혁명을 기반으로 한다.

인류 최고의 교육 목표는 불성을 확인하고, 부처가 되는 것. 즉, 선종에서 말하는 줄탁동기(啐啄同機), 안팎에서 동시에 쪼아 부처로서의 완전한 인격체를 이루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눈뜨고 발육하는 불성의 힘이 인이 되고, 이를 북돋는 타자의 자비가 연이 되어, 그 불성이 사회화되어 인류 속으로 확산되는 과를 이루는 것이다.

석존은 모든 생명은 윤회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서로 위치를 바꾸어 가며 인연을 맺는다고 설한다. 결국 타자녀교육은 자타 모두의 무명을 타파하고 개명(開明)하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대승의 일승(一乘)사상이 지향하듯 인류 모두를 부처로 만드는 일이다.

이처럼 생명은 은혜로써 연기되어 있기에 애초에 교육은 자타력의 병진을 본질로 한다. 법신불의 무한 축복에 의한 자아의 완전한 충족인 행복과, 인류의 영속성을 위한 소공동체인 가정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활불로서 인류사회 전체를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불토낙원으로 변화시켜가는 교육이야말로 성불제중의 사회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2017년 11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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