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경진 교도/강북교당
[원불교신문=허경진 교도]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이다. 푸릇한 본래의 색을 내려놓고 따뜻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이 아름답다.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낙엽은 깊어가는 가을을 더욱 잘 느끼게 해준다. 사계절 중 특별히 가을은 깊어간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본다. 깊어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여유를 가지면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생겨난다.

가을을 품은 자연을 보면 많은 것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사람도 그런 가을의 자연처럼 깊어지라는 뜻에서 가을은 깊어가는 계절이라고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자락에서 깊어가는 가을에 어울리는 두 곡의 음악이 생각났다.

이 곡들은 그 내용은 어려울 수 있으나 곡이 만들어진 배경과 곡을 만든 작곡가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공감하며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첫 번째 곡은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다. 피아노는 원래 두 손의 열손가락을 사용해 연주하는 건반악기로 그 어떤 악기보다 다양한 주법을 구사할 수 있고 화려한 연주를 할 수 있어 독주악기로 가장 대표적이다.

그리고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는 협주곡, 즉 콘체르토(Concerto)는 '경합하다'라는 말에 그 어원이 있다. 이처럼 화려한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대항하듯 연주하는 것이 특징이어서 그 어떤 악기보다 피아노 협주곡이 가장 화려하다.

그런데 이런 피아노를 독주곡도 아닌 협주곡에서 왼손만을 사용한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곡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보니 직접 전쟁의 고통을 경험했던 라벨이 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한 피아니스트를 위해 만든 곡이었다.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업인 피아니스트가 전쟁에서 한 팔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쉽사리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피아니스트를 위해 라벨은 혼신의 힘을 다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꼭 한 번 실제로 연주하는 것을 감상해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잘 없다가 몇 달 전 예술의 전당에서 드디어 이곡을 감상했다. 왼손만을 사용해 표현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처음의 생각과 달리 이곡은 매우 화려한 곡이었다. 특히 협주곡에서 독주자의 기량을 뽐내는 카덴차에서는 한손으로 양손 못지않은 음향과 기교를 보여줘 경이로움마저 들었다.

물론 이날 이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는 두 팔이 다 있는 연주자였다. 하지만 라벨과 이 곡을 처음 연주했던 왼손 연주자를 기리듯 오른손은 피아노의자를 잡은 채 한 번도 건반 가까이 가지 않았다. 작곡가인 라벨도 이 곡에 "두 손을 위해 만들어진 피아노 파트보다 더 빈약하지 않은 짜임새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두 번째 곡은 역시 프랑스의 작곡가인 올리비에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이다. 이 곡은 일단 악기의 편성부터가 특이하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4대의 악기를 위한 곡인데 피아노·클라리넷·첼로·바이올린으로 구성된다. 사실 이런 악기의 구성은 4중주에서 거의 잘 없는 편성인데 여기에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곡은 1940년에 작곡됐는데 당시 프랑스군이었던 메시앙이 독일군에게 전쟁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있던 중 만들어졌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영화나 책을 통해 간접경험은 해봤지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메시앙은 이 고통의 시간들을 견디며 수용소에 함께 있던 음악가들을 모았고 그러다보니 연주가 가능한 편성은 위에서 말한 4중주뿐이었다. 작곡가는 이 흔치 않은 구성의 4중주곡을 작곡한 후 수용소 내의 5천여 명의 포로들과 함께 초연을 하게 된다. 그리고 후에 이 곡에 대해 "결코, 나는 그만큼 주의 깊게, 그리고 이해하면서 음악을 들은 적이 없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예술작품은 탄생했고 그 예술작품 속에는 인간의 고뇌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들어있다. 위에서 소개한 두 작품이 이 깊어가는 계절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비록 곡 자체는 난해하고 어려울 수 있으나 거기에 담긴 음악가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감상한다면 깊이 있는 음악 감상이 될 것이다.

[2017년 11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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