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청천 교무/교화훈련부
▲ 토함산 석굴암 석불 앞의 소태산과 조송광(1931. 10.) “무정물 돌부처도 만인의 칭송을 받거든 어찌 사람이 가만 있으랴”며 소태산은 자칭 불려거사(不侶居士)라 한다.
땀 흘리며 일한 산업 부원들이 바로 부처님…활불사상 토로
대각전 건축시 심불일원상 봉안…불법의 시대화, 거진출진 강조

신룡전법상은 소태산이 신룡리에서 도덕회상을 열고 본격적으로 일대 교화경륜을 펼친 19년간의 활동상이다. 익산 신룡벌은 국중3호(國中三湖)라 일컫는 황등호숫가의 구릉지대로, 미륵산 아래 상시연(上矢淵) 이라는 황등호수 서쪽(湖西)은 충청도, 남쪽(湖南)은 전라도 그 중심에 위치한다.

호남평야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쌀은 미질이 우수해 일본내륙에서 폭등세였다. 총독부의 강력한 산미증산계획에 따라 조선의 농업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1920년 대규모 수리조합(益玉水利組合)이 발족되고 1923년에 대아리저수지가 축조됐다. 소태산은 이를 예견하고 교통의 중심지인 비산비야 구릉지대 익산 신룡벌에 회상 기지를 정했다.

기미년 겨울, 모악산 미륵전에서 짚신을 신고 나온 미륵은 익산까지 오는데 4년이 걸렸다. 소태산은 1924년 6월1일(갑자년 사월그믐), 마동 이리농림학교(1922. 4.1 개교) 시녀방죽 건너 산죽 우거진 죽산 보광사(普光寺)에서 회원 39명과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특이한 것은, 지은 지 4년밖에 안된 새 절 마당에 사람 덩치만한 갓 쓴 미륵이 높은뫼를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다. 용의 꼬리에 해당되는 죽산은 높은뫼 등을 타고 황등호수를 향하여 뻗어갔다. (현 영등교당이 용의 등에 해당함) 이 구릉은 호수 가운데로 뻗어나가 그 지명이 용곶인데(곶이란 삼면이 바다에 잠긴 지형을 이름) 바로 호수 건너편이 신룡벌이다.

황등호숫가 허허벌판 신룡리 344-2번지(3,495평) 잿배기, 갑자년 가을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불법연구회 회장 서중안은 김제 약방에서 자전거를 타고 50리 길을 매일 내왕했다. 길 하나 사이를 두고 왼쪽은 솔나무가 칙칙하게 들어찼고 오른쪽은 형적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흙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인가라곤 신룡벌 서쪽 해너머골 너머 석방, 북쪽 언덕바지에 오룡과 내곶, 동쪽 호숫가에 계룡 등 작은 마을이 있었다. 344-2번지 잿배기 공사장에 터를 닦을 때 유골이 세 가마나 나왔다. 부슬부슬 비 오는 날 저녁에는 시퍼런 도깨비불이 빗선을 그으며 돌아다녔다.

▲ 익산총부 구내 전경(1943. 6.) 사가와 공가 한데 어우러진 공동체다. 멀리 미륵산이 보인다.
허허벌판 신룡벌에 초가 두 채의 최초본관 도치원(道峙院)을 건축하고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 간판을 붙였으나 당장 먹고 살 길이 막연했다. 문정규가 엿장수를 하자고 발의하여 송적벽의 지도로 엿행상을 나섰다. 엿밥에 아카시아 반찬, 총재선생은 목침에 밥그릇을 올려 먹는 옹색한 살림이었다. 완주 대아리저수지의 수로가 완공되자 황등호수가 개답(開畓)되어 이청춘이 70마지기에 상당하는 재산을 희사하여 농토를 매입, 불법연구회 7개 부서 중에 농업부가 가장 활기를 띄었다.

기미년에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성 누하동에 미곡상을 하는 박대완(朴大完)이 중국화폐를 위조하다 체포됐다. 출옥 후 마음을 잡지 못하고 금강산 등 유명사찰을 방황하다 고향인 여수로 돌아가던 중 이리에 사는 친구 박 장로의 권유로 불법연구회에 찾아왔다. 정묘동선(1927)에 참예, 미션스쿨 기전여학교 3년생인 조전권 등 예기 있는 청년들과 전무출신실행단을 구성, 농공부(農工部) 활동을 전개했다. 똥지게를 지고 나무아무타불 흥얼거리며 구덩이에 부은 알봉 박농사가 대풍작을 이루었다.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철로를 타고 대전, 부산까지 진출했으나 뜻과 같지 않았다. 초가지붕마다 박이 주렁주렁 열리던 자급자족 시절이라 수지가 맞을 리가 없었다. 박대완은 계속 연구에 궁리를 하였다.

오사카에서 소학교와 중학을 나와 일본인농장 지배인과 기상관측소를 전전한 경험을 살려 익산 일대의 일본인농장에 출입하며 북숭아 재배에 관심을 기울였다. 묘목 한 그루에 보리 한 가마의 고가였으나 전망이 있다고 판단하고 의견안을 제출, 채택되어 농업부는 물론 사가까지 과수재배를 하게 됐다. 상조부에서 융자해주고 전문가를 초빙 기술지원 받아 성공적인 과수재배를 하게 되어 총부 근방 일대에 복숭아과원이 형성됐다. 이주하는 회원들이 계속 늘어나고 총부 구역도 자꾸 넓어졌다.

종사주가 직접 세세곡절 어려운 살림을 챙겨주며 상조부를 통하여 자금을 융자하여 첨단 산업인 복숭아과원, 돼지치기 등 활로를 찾았다. 과수원, 수박재배, 약초재배, 양잠, 축산, 양계 등등 신종 산업을 벌여 불법연구회는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새끼돼지 한 마리로 시작한 양돈은 자녀들을 고등교육 과정까지 가르칠 수 있었다. 농업부는 산업부로 확대 개편되어 불법연구회 상표를 붙인 달걀이 만주까지 판로가 개척되었다. 총부만 잘 살지 않았다.

수도학원을 개설하자 근동의 청소년들이 몰려들어 적극적으로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전국 각지의 회관에서도 야학을 실시했다. 7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함석지붕 공회당을 지은 지 6년만에 해너머골 언덕머리에 500명을 수용하는 화양식 건물 대각전을 지었다. 총부 구내가 좁아 입주하지 못한 회원들은 대각전 뒤 해너머골에 '불연'(불법연구회의 준말) 마을을, 연구실터(현 원광보건대와 원대 학생회관)에는 '신불연' 마을이 생겼다.

불법연구회가 날로 달로 발전하자 동아일보에 '물맑은 호수가의 이상촌 건설'이 소개되고 대판신문, 기독교계 등 시찰진들이 줄을 이어 방문하였다. 크게 드러나는 건물도 없고 정갈하게 잘 정돈된 초가뿐인 구내를 돌아보고 "귀교의 부처님은 어디에 모셨습니까" 물었다. 선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산업부원들을 가리키며 "저들이 우리 부처님 올씨다" 활불상(活佛像)을 보여줬다. 소태산은 경상도 첫 방문에서 통도사 적멸보궁에 들어가 불상이 없는 빈 방석에 앉아 설법하는 퍼포먼스를 보였고,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 가서 방명록에 "무정한 석굴암 돌부처도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거든 하물며 의식이 있는 사람이 어찌 그저 있으랴" 자칭 불려거사(不侶居士)라 휘호하였다. 지금 여기 숨 쉬고 말하고 활동하는 사람이 어찌 저 무정물에 불과한 돌부처와 비교되겠느냐고 활불사상(活佛思想)을 토로했다.

▲ 대각전 불단의 사은위패(1935. 4.28) 얼마뒤 심불 일원상으로 바뀐다.
1935년(원기20) 대각전 건축시 불단에 사은위패(四恩位牌)를 모셨다. 등상불이 아니라 심불 일원상이었다. 동시에 〈조선불교혁신론〉을 발간, 출가불교가 아니라 재가주의 불교 즉 알차고 실력 있는 거진출진(居塵出塵)이 주인행세를 해야 된다며 불법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역설하였다.

익산총부는 재가출가 한데 어울려 사는 공동체였다. 원기28년(1943) 6월 현재 총부 건물은 사가 10채 공가 11채이다. 전무출신자들은 낮에 공사에 임하고 총부식당에서 먹고 잠은 사가에 가서 잤다. 남편은 출가고 부인은 재가이다.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닌 하나였다. 총부에 이사 온 회원들의 자녀가 계속 태어났다. 총부 아이들은 경기고녀(현 경기여고) 출신 김영신과 경기고보생 박창기의 지도로 소년단 활동을 하였다. 총부 보육원 자혜원은 이화여전 보육과 출신 황정신행이 지도했다.

명절이 되면 종사님은 여제자들에게 "울긋불긋한 옷도 입고 나오너라. 어디 보자"며 깔깔회를 열어 "나와서 다 놀아라. 무엇이라도 해라. 닭소리라도 해라. 돼지 소리라도 해라." 대중의 기운을 복돋았다. 돌아가며 각기 재주 자랑을 하는데, 훤칠한 키에 이마가 훌렁 벗겨진 회중 최초 견성도인 삼산선생은 느릿느릿 굼뜬 몸짓으로 흔들흔들 서양 댄스를 추어 좌중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칠순 노옹 문정규의 피마디 튀는 목소리의 영가무도, 김정종 김대거 두 소년의 코미디 일막, 송규 선생의 체조에 가까운 주먹춤, 사산 선생의 비만한 체격에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어깨춤 등등 충정에서 나오는 낙도의 모습에 만장의 박수 소리는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겨울 정기훈련 기간 중에 모든 선객들이 어린아이 마냥 즐겁게 술래잡기를 하였다. 술래가 눈을 가리고 다른 사람을 잡는 까막잡기 놀인데 종사주가 심판을 보았다. 김영신이 눈을 가리고 술래가 되어 사람을 찾다가 겨우 한 사람을 잡았다. 별 다른 반응이 없어서 위에서 아래로 더듬었는데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아, 야가 왜 이려, 왜 이려." 가린 수건을 풀고보니 종사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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