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맹자가 살던 시대도 의(義)보다는 잇속이 앞서는 세태가 만연했다. 그는 말한다. 사람이 물고기도 좋아하고 진미인 곰발바닥도 좋아하는데, 두 가지를 함께 얻을 수 없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또한 생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함께 얻을 수 없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택하리라. 이것이 그 유명한 사생취의(捨生取義)다. 진미만큼이나 의가 소중함을 역설(逆說)적으로 말한 것이다. 맹자는 작은 이익에는 죽음을 무릅쓰고까지 예의를 따지고, 큰 이익에는 눈이 어두워 예의를 팽개치는 당시 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오늘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인과 범인은 이처럼 의와 이익을 판별하는 것에 그 차이가 있다. 공도(公道)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무한히 개방할 때 가능하다.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 숱한 무명의 인사들이 구국의 대열에 들어서고자 중국 임시정부의 문을 두들겼다. 그리고 만주에서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여든 애국지사들이 풍찬노숙하며, 백성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을 온통 던져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공도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크게 얻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말하는 인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움을 말한다. 또한 맹자가 말하는 의는 마땅한 도리(義理), 떳떳하고 바른 길(正義),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른 길(道義), 공정한 길(公義)을 말한다. 이 인의(仁義)가 마음에 확고히 섰을 때, 전도된 현실을 바루기 위한 정당한 분노와 더불어 실천이 따른다. 의사(義士)나 열사(烈士)는 인의 구현을 위해 심신을 바친 분들이다.

공도는 큰 길이다. 큰 도로를 공도라고 하는 것은 다수 대중이 이 길을 함께 걸어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을 공익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공도와 공익을 중시했다. 모든 존재가 은혜로 얽혀있으며, 결코 고립되어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반대로 공공(公共)의 길은 당연히 공동체를 더욱 윤택하고 행복하게 한다.

생각해보라. 석존, 공자, 예수, 마호메트 같은 분들이 어찌 변함없이 이 세계에서 존경받고 추앙받으며 숭배되고 있는가. 그분들은 사욕보다는 공도를 위한 길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될 길을 몸소 실천했다. 그 공덕은 시공을 초월하여 무명의 인류에게 빛이 되어 한없이 빛나고 있다.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음에도 그 덕상과 힘은 우리의 양심을 흔들고, 지도조차 없는 인류 미래의 마지막 보루가 되고 있다. 무한자비불로 인류와 함께 하고 있는 이분들보다 더 큰 공도자가 어디 있으랴. 공도자 숭배 조항의 언급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그분들의 말씀이나 영정이나 조상(造像)은 세계에 널리 퍼져있다.

공도자 숭배는 인류 모두가 가져야할 공공의 윤리이다. 법신불의 진리로부터 인간에게 발현된 인의를 실현한 공도자를 우리가 떠받드는 일은 이 사회에 희망을 준다. 특히 사욕으로 어지러워진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며, 불의를 배척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공도자는 성현들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가장 성스러운 삶을 구현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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