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교단의 경제적 토대가 되고, 소태산 대종사의 법낭(法囊)으로 훗날 〈대종경〉 편찬에 큰 힘이 됐던 구타원 이공주 종사. 그의 생애와 활동을 마산교당 정명숙 교무가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구타원은 1896년 서울 대조동(현 종묘)에서 부친 이유태와 모친 민자연화의 3남3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부친은 조선 중기 문신인 이항복의 후손으로 일찍이 부정부패에 시달린 벼슬길을 멀리하고 지조를 지킨 선비였고, 모친은 생각이 매우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부인이었다. 부모의 정신을 물러받은 구타원은 어려서부터 자질은 총명예지하고 기상은 강의고결했다. 어려서 천자문과 소학을 배운 후 10세에는 한문, 산술, 초급영어를 배웠다. 1909년에서 1913년 대한제국 황실의 윤비황후의 시독으로 창덕궁에 입궐하여 1910년 퇴궁하기까지 만 6년간 궁중의 법도와 한문, 일어 등을 공부했다.

그가 21세 때 박장성과 결혼했으나 장남 남기(법명 창기), 차남 동기를 낳고 급성폐결핵으로 1922년 남편은 별세했다. 27세 젊은 나이로 갑자기 남편을 잃은 이공주는 커다란 슬픔에 빠져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하다 소태산을 만나게 된다.

소태산과 구타원의 역사적 만남은 원기9년 11월이었다. 소태산의 두 번째 상경길이었다. 육타원 이동진화가 마련한 동대문 밖 창신동 수양처를 미타원 박공명선의 소개로 모친 민자연화, 언니 이성각과 더불어 방문하여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이 때 대종사는 이공주에게 공주(共珠)라는 법명을 내리며 말했다.

“구슬이란 매우 보배로운 것이요. 그러나 구슬도 한 두 사람만이 가지고 보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이 가지고 보는 것이 더욱 가치 있고 보배로운 것이며 그대의 법명을 공주라 하는 것은 세계 인류가 모두 함께 보는 보배로운 구슬이 되어 달라는 뜻입니다.”

당시 소태산의 제자 중 구타원은 학식과 재질이 뛰어나 소태산의 법문 수필로 회보에 발표하는 등 회원들에게 수행의 길잡이가 됐다. 그의 법문수필은 원기12년 5월 기관지인 <월말통신> 창간호의 ‘약자로서 강자되는 법문’을 비롯해, ‘좌선에 대한법문’(<회보>15), ‘돈 버는 방식’, ‘사은사요의 필요성’, 등은 교리체계로 〈정전〉에 편성됐다. 또 ‘나의 가르침은 인도상 요법이 주체이다’, ‘나는 용심법을 가르치노라’ 등은 〈대종경〉에 채록됐다. 이러한 구타원에 대해 소태산은 “이공주께서 나의 법을 가장 많이 설해 주었다. 공주는 나의 법낭이다”며 “공주는 낙언성실(落言成實)하고 투필성자(投筆成字)한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법낭이란 아호가 생겼다.

또한 구타원은 글을 해독한 이후 일생을 기록과 함께 했다. 특히 1909년 5월14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일생 동안 계속된 데다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자신의 생애는 물론 교단사의 정리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했다. 필명이 청하였으며 그의 저술은 소태산의 법문수필에서부터 시·논설·역사기록 등 다양하며 활자화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 수고본(手稿本)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구타원의 이러한 행적은 원불교 기록문화의 효시이기도 했다.

재력가이기도 했던 구타원은 큰아들인 묵산 박창기 대봉도와 함께 부군 박장성으로부터 물려받은 일천 여 마지기의 재산을 교단 경계운영에 보태 큰 도움을 줬다. 초기 각종 교서 인쇄비용과 ‘회보’ 발행 비용이며, 총부 대각전 신축, 제1대 성업봉찬사업 등에 희사한 공로로 원기42년 제1차 법훈여식전에서 대봉도의 원훈을 정산종사로부터 증여받는다. 이후에도 개교반백년기념사업, 교단인재양성, 해외교화후원, 제2대말 및 대종사탄생백주년성업봉찬 등 수많은 교단사의 중추적 역할을 다했다.

구타원은 만년에 총부수도원과 서울수도원을 내왕하면서 서울보화당한의원 등 경영을 이끌다가 원기76년 1월2일 열반한다. 출가와 더불어 교단요직에 임하여 100세 가까운 생애를 살면서 교단발전의 현장을 지킨 인물로 원불교 창립기부터 공부와 사업 양방면에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 점은 후래 제자들이 높이 배워야 할 점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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