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응주 교무/법무실
사흘 마음공부 천년 보배…천상락 구하기 힘쓰고
백년 탐낸 물건 하루 티끌, 무상에 집착 말아야

佛言- 吾視王候之位를 如過客하며 視金玉之寶를 如礫石하며 視紈素之好를 如弊帛하노라
"부처님 말씀하시되 내가 왕후의 위(位) 보기를 과객 같이 하며 금옥의 보배 보기를 자갈 같이 하며 좋은 비단 보기를 헌 걸레 같이 하노라."


〈사십이장경〉 42장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그것의 실체는 아니니 헛된 것을 놓고 참되고 영원한 것을 구하라는 말씀이다. 왕후의 자리나 금과 옥, 좋은 비단은 모두 사람들이 가장 오르고 싶은 자리이고, 소유하고 싶은 물건이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보면 왕후의 자리가 늘 안락하고 편안한 자리만은 아니며, 금옥도 나를 행복하게도 해 주지만 그것은 잠깐이고 불행을 불러오는 자갈과 같은 존재이며, 비단도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헤어져 걸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욕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는 세상을 중생의 눈이 아니라 모든 현상 속의 참모습을 간파하는 부처님의 법안(法眼)으로 보고 하는 말이다.

오시왕후지위 여과객(吾視王候之位 如過客)은 나는 왕후의 자리를 지나가는 과객처럼 본다는 말이다. 과객이란 지나가는 나그네를 뜻한다. 지나가는 나그네는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고 관심을 갖고 대하는 사람도 없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이처럼 왕후의 자리가 나라를 다스리고 부귀영화를 대표하는 자리지만 이들이 누리는 영화는 영원한 시간속에서 보면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한순간에 지나지 않은 자리이기 때문에 갖은 암투와 전쟁을 치루며, 혈육 간에 피비리내 나는 자리다툼을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주어도 받지 않을 자리인 것이다. 부처님은 잠시 동안의 영화를 위해 수많은 시간을 번민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돌아오는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다.

시금옥지보 여역석(視金玉之寶 如礫石)은 우리가 보물로 여기는 금과 옥을 자갈돌처럼 본다는 뜻이다. 금과 옥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물건을 지칭하고 자갈돌은 길거리에 널려서 많은 사람들의 발에 차이는 하찮은 물건을 뜻한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금과 옥은 있으면 행복하지만 없어지면 괴로워지는 물건이기에 거기에 착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시환소지호 여폐백(視紈素之好 如弊帛)은 좋은 비단을 떨어진 누더기 옷처럼 본다는 말씀이다. 우리 몸을 감싸는 부드럽고 따뜻한 것의 대명사가 비단이라면 걸인이 입고 다니는 옷을 누더기 옷이라고 한다. 비단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이 좋은 듯하나 결국 비단옷도 영원히 좋을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가는 누더기 옷이 되어 버려질 뿐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시간과 힘을 쏟고 있다. 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자유를 얻기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쾌락과 유희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고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통열한 채찍의 말씀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옛 성인의 말씀에 ‘사흘의 마음공부는 천년의 보배요, 백년의 탐낸 물건은 하루 아침 티끌이라’ 하였건마는 범부는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므로 자기의 몸만 귀히 알고 마음은 한 번도 찾지 아니하며, 도를 닦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알므로 마음을 찾기 위하여 몸을 잊나니라. 그런즉, 그대들은 너무나 무상한 모든 유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천상락을 구하기에 힘을 쓰라"고 말했다. (<대종경> 불지품 16장)

75억 인류 중에 마음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마음공부를 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 중생들은 마음이 있는 줄은 모르고 오직 몸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본능에 의해 재색명리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질주한다. 마치 불나방이 화려한 불을 쫓지만 결국 그 좋아하는 불에 타들어갈 줄 모르고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달려간다.

한 감상이 든다. 교도로서 〈정전〉, 〈대종경〉, 〈정산종사법어〉 등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이 보았지만 불조요경을 공부하는 교도는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 있어 자칫 지루하고 따분할 수 있다. 혼자 공부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쉽고 평이하게 누구든지 공부할 수 있도록 법을 짜 놓은 소태산 대종사는 굳이 한문으로 된 불경을 보조경전으로 채택하여 공부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태산 대종사가 미처 하지 못한 말씀이 이 불조요경 속에 들어있지는 않을까? 부처님의 경전을 빌려 당신의 뜻을 전한 내용이 분명 있다고 한다면 불조요경도 우리가 반드시 공부해야 할 목록에 넣어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사십이장경〉의 연재를 마친다. 연재를 시작할 때는 2500년 전의 부처님 말씀을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으로 다시 해석해서 그 의미를 살려내고 싶었고, 참다운 진리는 시간이 지나도 여실하게 현존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깊고 넓은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으로 글을 끝내고 말았다. 앞으로 공부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 다음 호부터는 원광대학교 임병학 교수의 '대종경, 주역으로 만나다'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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