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화의 양적·질적 관리 〈교화통신〉.
원기56년(1971) 개교반백년기념대회를 전후한 한국사회는 도시화·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시기였다. 당시 교단적으로 한국의 역사문화에 원불교의 위상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경주됐다. 도시교화 특히 수도권교화에 힘쓰게 됐고, 원기62년(1977) 교구제(敎區制)를 시행할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교화환경의 변화 내지 확대는 그 양적·질적 관리를 필요로 하게 됐다.

원기60년(1975) 교정원 교무부를 교화부로 바꾼 것이 이를 대변하는데, 이듬해에 교화부 소속 교화연구소(소장 이광정)는 〈교화통신〉을 발행한다. 4×6 배판 4쪽으로, '교화정책 주지, 교화자료 제공, 교화정보 교환'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계획성 있고 입체적인 교화의 실현, 교화정보의 교환 등이 절실해졌다는 말이다.

창간호는 '체험적 교화론-시내버스와 손수건'(류기현), '교화의 횃불'(이광정), '6월의 교화'로 추모의 달에 열리는 각처의 법회와 행사를 소개했다. '보람을 가꾸는 삶'에 전체와 미래를 위한 공도정신, 황무지의 여장부, 한 소년의 애국심, '교화일선의 이모저모'에 각 교당의 교화상황을 전하고, '교구별 평균출석 상황'일반·청년·학생·어린이 모두 결성된 37개 교당의 이름을 올리고, '교구별 교당개척 상황'에 신설교당 13, 출장지 25, 개척 예정지 등 87개를 소개했다.

'체험적 교화론'에는 2호에 교양강좌의 보람(김이현), 3호에 꽃시장 가는길(김보현) 등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교화현장의 상황을 전하고, 교화행정과 교화자료를 제공해 오다가 지령 68호에 이르러 〈교화〉로 제호를 바꾸고 16호쪽으로 확대하여 발행했다. 원기67년(1982) 87호를 끝으로 잠정 중단되었다가, 원기74년(1989) 〈교화통신〉으로 다시 발행했다.

창간호에서 보는 바와같이 4쪽이라는 짧은 소식지에 교단 전체의 교화상황과 전개할 방향이 확연히 드러난다. 교화를 중심으로 하는 교단의 정책방향과 함께 교화현장에서 활동하는 교무들의 혈성을 읽어낼 수 있다. 웅비하는 교단의 모습을 확인하는데 4쪽짜리 보고서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오늘의 교화현장에 이들 자료가 잘 철해져서 교화에 이용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역사가 오늘을 살피는 내일을 여는 거울이라 한다면, 분명한 것은 활발한 교화현장의 기획자료이 이들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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