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산종사는 종법사 취임 초기 삼동원에 머물렀다. 대산종사가 삼동원에 주재시 여름방학을 맞은 예비교무들이 찾아와 훈증을 받았다.
삼동수양원 발족으로 시작된 삼동원

신도교당 교도는 거의 노인들로서 30여 명 정도가 예회를 봤다. 대산종사는 신도안에서 주로 '교리도해' 법문을 주로 설했다. 신입종법사가 신도안에 주로 머물고 있는지라 총부나 지방으로부터 손님의 내왕이 끊이질 않았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보통 20명~30명이 오고 많을 때는 100여 명이 모였다. 당시 신도안은 형편이 어려워 끼니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잘 방도 없었지만 재가출가 교도 어느 누가 찾아와도 반갑게 맞이했다.

원기47년(1962) 12월에는 대산종사가 이병은 교무에게 지역사회 청소년을 위한 야학원을 설립하라 명한다. 이병은 교무는 이후 7년간 야학을 운영했다. 신도안은 낙후지역이어서 야학을 통한 주민의 생활개선, 문맹퇴치, 미신타파운동 등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야학원을 통해 원불교는 수신하는 종교, 생활하는 종교, 활동하는 종교의 모범을 보여 지역사회의 호응을 얻게 됐다. 7년 동안의 야학은 지역주민은 물론 850여 명의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가치의식을 심어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원기50년(1965) 대산종사는 신도교당 이병은 교무에게 "이곳에 대건축을 하면 집 이름을 이렇게 붙여라. 세계 종교 대동화합을 위한 삼동원(三同院), 상극의 업장을 녹이고 상생의 기운을 사리는 보은전(報恩殿), 그리고 선후천의 막힌 한을 트고 덕을 쌓는 음덕전(陰德殿)이라 하거라"고 유시했다. 원기52년(1967) 신도안에 가을 교단의 최초 훈련기관으로 삼동수양원이 발족됐다. 원기49년(1964) 3월 이병은 교무는 대산종사의 경륜을 받들어 교단의 각종 훈련과 요양을 겸한 장소로 신도안을 개발하기로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라 1차 공사를 시작해 법당 1동, 수양실 2동, 식당 1동 등 총 651㎡의 시설물을 갖추고, 원기52년 10월19일 수위단회에서 삼동수양원으로 기관승인을 얻었다. 초대 원장은 동산 이병은 교무가 선임됐다.

원기53년(1968) 봄, 대산종사는 종법사 취임 후 6년 동안 주석해있던 신도안을 떠나 법좌를 익산 근교 수도산 금강리로 옮기게 됐다. 언제나 찾아오던 손님들로 북적이던 삼동수양원이 빈집처럼 적막해졌다. 종법사가 주재하지 않자 삼동수양원은 경제적·정신적으로 어려움이 뒤따랐다. 설상가상으로 이병은 원장이 건강을 상실하고 치료를 받게 되면서 잠시 침체기를 겪게 된다.

삼동수양원은 원기59년(1974) 10월 교정원 원의회로부터 삼동원으로 개칭 승인을 얻었다. 삼동원은 대종사의 일원대도에 바탕해 2대 정산종사가 제창한 삼동윤리인 동원도리(同源道理), 동기연계(同氣連契), 동척사업(同拓事業)의 정신으로 실천하여 모든 종교와 민족과 사상의 장벽을 트고 누구나 이곳에서 훈련하고 요양할 수 있는 자연함양도량, 자연훈련도량, 자연요양도량을 이룩하기를 목적했다. 동년 11월 개판리의 자갈밭 하천부지 약 33,000㎡을 연 2천여 명의 인부를 동원, 보토 작업해 인삼밭을 경작했다. 이곳을 일러 개판농장이라 명했다. 원기63년(1978) 만성전 부지 21,719㎡를 매입했다. 각종 시설물의 1차 건축을 끝낸 원기49년 8월부터 각종 훈련을 실시해 교역자 300여 명, 기관장 200여 명, 청년과 학생 1천여 명, 일반교도 5천여 명으로 연 6천500여 명이 훈련을 치뤘다.

하계훈련장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한 삼동원은 교도들의 개인성금으로 훈련 숙소 3동(2층)과 부속건물 등 연면적 1795㎡를 신축해 수양, 훈련 시설을 보완했다. 초가 한 채로 시작한 삼동원의 설립취지를 이해하고 그 사업계획을 듣고 뜻을 세워 발심한 교도들의 희사금으로 이뤄진 것이다. 또한 원기63년(1978)부터 삼동원은 장소만 빌려주던 훈련원에서 직접 삼동원이 주관하는 훈련을 개최해 연 1천500여 명의 일반교도와 250명의 전국학생 간부훈련을 운영하고, 교단내 뿐만 아니라 새마을 중앙연수원 교관단 훈련(1979), 함열 천주교의 피정(1980), 전국 방송통신대 간부훈련(1981)도 진행했다.

▲ 밭을 일궈 내며 쌓였던 돌들을 모아 담을 쌓았다.

국가 군사기지화 6.20사업

원기68년(1983) 7월27일 정부에서 신도안 일대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을 두마면사무소에 집합시켰다. 신도안 일대 군사기지화 확정에 대한 정부방침의 일방적 통고였다. 이른바 '6.20사업'이었다.

동년 8월8일 원불교 중앙총부 대각전에서 '신도안 기관 및 교당에 관한 건'으로 206회 긴급 원의회를 열었다. 6.20사업조사 보고에 김혜봉 교무는 "6.20사업전개 이전에 시행됐던 농지정리사업과 도로포장은 미연에 정지돼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6.20사업은 우리정부차원이상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한 신도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됐을 때 연고권 문제에 대해서도 "국방부에서의 설명은 환매권이 있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전해왔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신도안 지역의 군사기지화 계획에 대해 교단은 도량수호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되, 정부차원에서의 진행에 양보할 수밖에 없다면 이동에 따른 보상, 이동지역 조사, 교당 이전 등에 대해 신속한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책위원장에 김윤중 교정원정으로 선정, 현지수호 대책마련의 제1분과와 타지역 이동에 따른 대책마련 제2분과, 신도안 문제에 의견통일 대책마련의 제3분과를 구성해 각분과별로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교단은 도량수호를 힘썼지만 국가시책에 의해 부득이 이전결정을 내리게 됐다. 신도안의 원불교 부지는 총 188,429㎡로 군사기지화 확정 사업으로 현재 군시설이 들어선 상태이며, 정부와는 군사기지가 이전 또는 폐쇄할 경우 환매 순위를 원불교에 우선한다고 했다. 원기69년(1984) 3월7일 그동안 여러 방면으로 물색해오던 삼동원 부지를 논산군 벌곡면 양산리 산35-3번지로 확정하고 991,735㎡를 계약 체결하게 된다. 동년 3월 연인원 647명이 동원돼 정원수 이식 작업과 가건물 3동을 설치했다. 6월20일 삼동원 이설추진위원회를 구성, 30일 완전히 철수를 완료했다.

원기75년(1990) 5월9일 천호산 계곡에 대내외적으로 손색없는 훈련기관이 건축면적 3,676㎡의 훈련시설을 갖추고 신축 봉불식을 거행함과 아울러 만일기도 회향 대법회를 열었다. 이후 현재까지 삼동원은 삼동윤리 실천 도량으로서의 누구나 정신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개방적인 도량, 교단의 사회적 훈련 중심 도량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신도안 목단밭은 농사일이 어려운 시기에 조성됐다. 목단밭을 둘러보는 대산종사.
계룡에서 결실, 금강에서 결복

정산종사는 "길룡에서 탁근하고 신룡에서 개화하며, 계룡에서 결실하고 금강에서 결복한다"는 말씀을 남겼다. 신도안에서 훈련도량을 이뤄 현재 삼동원을 이루기까지 소태산 대종사로 시작해 정산종사와 대산종사로 그 경륜이 이어진 회상의 역사는 결복을 향해 가는 후진들이 선진의 뜻을 이어 받아 가야할 방향로 일 것이다.

신도안의 옛 부지도 중요하지만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 대산종사가 이뤄내고 싶어 했던 교단의 결실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금강에서 결복한다는 정산종사의 말씀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승의 뜻을 이뤄내려 애쓰는 후진의 정성을 말하고 싶다. 신도안의 역사는 우리에게 그런 의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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