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삼학은 소태산 대종사가 말씀했듯이 일원의 원리를 깨닫는 것(견성), 일원의 체성을 지키는 것(양성), 일원과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것(솔성)이 핵심이다. 이 삼성이 일원상 진리의 속성인 공원정으로 나누어져 각각의 수행 세계를 드러낸다. 삶속 수행인 작업취사에 이르러서는 무념행, 무착행, 중도행으로 드러나야 삼학은 완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산종사는 삼학의 표준을 각각 해탈, 대각, 중정이라고 한다. 어떤 삶의 환경에 처할 지라도 자신의 영성이 최종적으로 나아가야할 궁극의 세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삼학은 원래 석존 당시부터 불교 교학으로 발전 심화된 수행의 방식이다. 석존의 말씀을 분석 정리한 〈구사론〉에 따르면, 계학은 계를 수지하여 신구의 악업을 방지하는 것, 정학은 선정의 실천으로 마음의 산란함을 벗어나 견성 오도하는 것, 혜학은 지혜로써 번뇌를 끊고 불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석존이 설한 사성제인 고집멸도의 가르침에서 고를 떠나 도를 이루는 방법인 것이다. 8정도는 이 삼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수행방식이다.

석존은 이 삼학에 대해 〈잡아함경〉에서 "때때로 계행을 더 향상시키기 때문에 공부라고 말하며, 때때로 닦고 배워서 마음을 더 향상시키기 때문에 공부라고 말하며, 때때로 닦고 배워서 지혜를 더 향상시키기 때문에 공부라고 말하느니라"라고 설하며 쉼 없는 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삼학 공부의 최종 목표는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과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열반적정을 얻는 것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소태산은 원불교의 삼학이 이러한 불법의 삼학과도 같다고 한다. 해탈과 열반을 향한 수행의 근본에서는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차이점이 있다. 정산종사는 그 점을 명확히 했다. 개인의 계문을 주로 하는 과거의 계에 비해 작업취사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모든 작업에 빠짐없이 취사하게 하는 공부이고, 자성에서 발하는 과거의 혜에 비해 사리연구는 모든 일과 이치에 두루 알음알이를 얻는 공부이며, 선정에 취중한 과거의 정에 비해 정신수양은 동정간에 자성을 떠나지 않는 일심공부라 했다. 석존시대의 삼학은 계와 정을 기반으로 지혜를 얻는 것이 목표라면, 원불교 삼학은 오히려 수양과 연구를 기반, 취사를 통해 불국토를 건설하자는 것에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 삼학은 가마솥의 세발 또는 해가 비치는 세숫대야로 비유한다. 전자는 지정의 삼 속성을 가진 인간이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데에 필수요소라고 보는 것이며, 후자는 계를 대야에, 잔잔한 물을 정에, 붉은 해를 혜에 비유해 삼위일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원불교의 삼학 또한 이 비유와도 상통하며, 여기에 생활 속 경계에서 공부하는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현대사회가 과거의 정적인 세계에서 탈피해 대인과 대물 관계가 더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정보사회의 발전으로 쌍방향 소통은 물론 다양한 정보를 늘 접할 수 있고, 개인은 인류 전체의 행동양식과 더욱 긴밀히 연결됐다. 가마솥이나 세숫대야를 넘어선 개인의 삶은 외부와 직접 관계하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자신 스스로 무한한 외부 세계로 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에 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원불교의 삼학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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