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림동 분위기가 오롯이 조화를 이룬 한희원미술관은 건축용 철판인 아르방을 이어 붙여 만든 대문과 고풍스런 한옥이 길손의 마음을 이끈다.
"어린 시절 예술적 자양분이 됐던 양림동에
빚을 갚는 마음으로 바치는 헌화다."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나는 오늘 윤동주의 별을 보았다/ 양림동 언덕 위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 사이로 별 하나 스치듯 진다/(…중략)/ 문득 사람이 그리워진다./<양림동의 별> 한희원 작.

'문득 사람이 그리워진다'고 고백하는 시인이 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 양림동 분위기가 오롯이 조화를 이룬 한희원미술관이다. 양림 오거리에서 이장우 가옥을 지나 최승효 가옥으로 가는 고즈넉한 골몰길인 양촌길, 그곳에 들어서면 건축용 철판인 아르방을 이어 붙여 만든 대문과 고풍스런 한옥이 길손의 마음을 이끈다.

한희원과 양림동 사람들

시 쓰는 화가 한희원. 그에게 양림동은 고향이자 정신적인 토대를 이룬 뿌리 같은 곳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방림동과 양림동 사이를 지나는 철길 옆에 자리잡은 기와집으로 이사를 했다. 철길 옆에서 얼마간 살다가 양림동 언덕위에 있는 교회의 아랫집으로 옮겼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 시절, 그의 부친은 시골학교 교장으로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는 양림동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양림동에서 보냈다는 그. 남광주역에서 효천으로 가는 철길 옆에는 푸른 초원과 오래된 석조건물이 있었다. 골목길과 교회당 그리고 곳곳이 숲으로 둘러싸인 초원이 그의 놀이터였다. "백년이 넘은 오웬기념관이 그때는 학교 강당으로 쓰였는데 태권도 부원들의 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그곳이 광주 최초의 공연장인 줄도 모르고, 밤늦은 시간까지 샌드백을 두드리며 운동을 했다고 전하는 그, 얼굴에 미소가 담긴다.

그의 이야기는 양림동 사람들로 이어진다. "양림동은 많은 예술가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가가 된 정율성, 동양의 차이코프스키라고 불리는 정추, 그의 동생인 아동음악가 정근, 수채화가 배동신이 있다"고 소개했다. 황영성 화백도 오거리 골목에 집을 마련했다. 그는 "대학시절 풍경화 수업을 할 때면 화구를 챙겨서 교수님과 함께 사직에 오르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양림동은 비단 예술인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교회당이 있는 언덕길에도 많은 문인들이 살았다. 언덕에서 보이는 방림동에는 '봄비'의 시인 이수복이 살았다. 웃교회 옆에는 가을과 고독의 시인 김현승이 살았다. 김현승 시인의 부친은 김창국 목사로 양림교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였다.

그는 원로소설가 문순태씨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징소리'와 곽재구 시인의 시 '사평역에서'의 모델이 됐던 곳도 남광주역과 철길 등 이곳 양림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양림동 출신이었던 조소혜씨 역시 친구의 여동생으로 '젊은이의 양지'와 '첫사랑'을 집필했던 작가다.

그리고 이어지는 양림동의 정신. 그는 양림산 정상에 안치된 스물한 명의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추모했다.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양림동에 병원을 지었고, 당시 많은 한센병환자들이 양림동을 찾았다. "선교사들의 신앙은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또한 최흥종 목사와 조아라 여사 같은 분들이 환자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의 광주정신의 모체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가 미술관을 운영하며 전하는 '사랑, 위로 그리고 양림동의 정신'인 것이다.

▲ 양림동의 정신을 전하고 있는 한희원 작가.
양림동 정신의 부활, 장터전

숭일고 시절, 태권도 선수였던 그. 무도인의 강인함이 다져진 그가 걷고 싶었던 길은 문학도였다. 그러나 문학도의 길을 접어야 했고, 다시 도전한 길이 바로 미술의 세계였다. 늦게 시작한 그림이지만, 안에 내재되어 있던 예술적인 소양과 풍부한 감수성이 그를 화가로 정착시키기에 충분했다.

'광주의 작가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라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우울한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예술가였다. 예술이 현실을 연결시켜야 한다는 생각, 그는 당연한 듯 진실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고통 받는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던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민초의 삶을 담담하게 그렸던 소박한 민중미술에 매진하던 시절이었다.

순천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사회참여를 했고, 다양한 문화예술 공동체 활동을 하며 '찾아가는 예술'을 지향했다. 진정한 민중미술은 그 당사자인 노동자, 농민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광양, 순천, 화개장터 등 장터를 찾아 작품을 트럭에 싣고 다니며 개최했던 장터전. 작품의 주체와 객체가 모두 참여하는, 예술의 진정한 교감이 이뤄지는 '살아있는 전시'로, 장터전은 당시 토론의 장이 되기도 했다.

세월의 질곡을 넘어, 광주로 귀환한 그는 14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과 광주에서 열었던 첫 전시에는 10여 년간 작업했던 작품 150점이 선보였다. 민중미술시절의 수채화부터 다시 시작한 유화에 이르기까지, 서사적이고 대륙적인 대작들은 대단한 반응을 얻었다. 이후 수없이 많은 초대전 요청이 쇄도했고 매년 2번의 개인전 등 엄청난 작업을 요구했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길과 병행하던 교육자의 길을 접고, 그는 전업 작가가 됐다. 양림동 정신을 이야기하는 한희원미술관은 그렇게 태동됐다.

▲ 한희원미술관은 드라마 작가를 비롯, 한 해 20만 명이 다녀가는 광주의 대표적인 문화예술공간이 되고 있다.
양림동에 바치는 헌화, 한희원미술관

그는 2003년 남구종합문화예술회관 개관기념 초대전을 양림동을 주제로 한 미술전으로 진행했다. 이후 '굿모닝 양림' 축제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양림동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미술관 공간이 권위적이거나 큰 공간이 아니다. 또 무료로 운영되고 있다. 선교사들이 무상으로 바친, 양림동의 정신을 유지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 미술관은 한 해 20만 명이 다녀가는, 광주의 대표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한 달 운영비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업 활동을 늘려가며 이를 그대로 감수하고 있다.

"미술관은 어린 시절 나의 예술적 자양분이 됐던 양림동에 빚을 갚는 마음으로 바치는 헌화다." 그의 말이 따뜻한 사랑이 되고, 위로가 되고, 그렇게 세상을 향한 양림동의 정신으로 오래도록 전해질 터. 찬 겨울바람을 이겨낼, 마음의 온기를 더하는 그는 양림동 사람이다.

[2017년 12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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