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성지인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원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교무를 서원했던 작은 누나가 가족 모두를 입교 시켰다. 형님은 고교시절부터 교도생활을 했고, 나는 교당에 가지는 않았지만 누나가 준 입교증이 소중하다고 생각해 지갑에 넣고 언제나 가슴에 품고 지내왔다. 그리고 누가 종교를 물으면 원불교라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곤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이모부인 시산 김정문 정사님이 할 일 없으면 내가 일하는 곳에 와서 일을 도와주라고 말씀하셨다.

그 곳은 원불교 복지기관으로 노숙인을 위한(구 부랑인) 이리자선원이었다. 자선원으로 들어오면 집에는 갈 생각도 하지 말고 이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지낼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오라고 당부를 하셨다. 무서운 이모부의 명령으로 설렘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원기73년 가을 보따리를 싸서 이리자선원에 들어갔다.

자선원은 160여 명의 생활인과 함께 24시간 함께 한다. 160여 명의 생활인에 비해 직원은 원장님을 비롯한 9~10여 명으로 그야말로 열악한 환경이어서 일당 백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선원은 옛 원불교 선진님들의 일터이기도 하고 선진님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닮았다하여 알봉이라 불리던 곳으로 마동에서 이곳 신용동으로 이사를 온 지 3~4년이 지난 터라 몹시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입사일부터 원장님과 교무님,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며 잠깐 인사를 하고 어색할 겨를도 없이 뚝방에 가서 소깔을 베어오는 일부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 새벽4시에 기상을 하여 좌선과 명상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낮은 보은노력으로 상자접기, 돼지 키우기, 소 키우기, 비닐하우스 고추 모, 토마토 가꾸기, 논밭 농작물 가꾸기 등 일을 맡아 하던 원감님을 도와 자활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밤에는 염불시간과 참회반성으로 하루해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지냈다.

운전원으로 농사꾼으로 생활지도원으로 밤낮없이 생활인들과 함께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근무를 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기도와 법회로 원장님인 염산 이수오 종사님으로부터 법문을 들으며 내 마음에 끼인 때가 벗겨지고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 담배를 피우는 나에게 보통급 계문 중에 '연고없이 담배를 피우지 말라'라는 계문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더더욱 생활인들과 숙식을 하면서 생활지도의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으로서 남을 지도하려면 내가 먼저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담배를 뚝 끊었다. 법문공부와 더불어 점점 기질 변화되는 나의 모습에 스스로 대견함을 느꼈고 자선원이 원래 내가 살던 집이었고 생활인들이 원래 내 가족이었던 것처럼 자선원에서 삶이 즐겁고 보람되고 행복해졌다.

이리자선원에 나를 보내놓고 나에 대한 걱정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야가 하룻밤 자고 도망 올라나? 일주일 자고 도망 올라나? 걱정하다가 몇 년이 지나 버렸시야. 이제는 자선원 사람이 다 되어 쓰겄다'하시며 밤낮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을 듣고 더욱더 기질변화와 마음공부에 매진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해 한희명 교무님께서 전무출신을 권유하셨다. 30대 중반이 넘은 나이이기도 하고 지금 이대로 살고 싶다고 했더니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살면 된다고 하여 전무출신 서원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원기83년 출가해 지금까지도 경계를 당할 때마다 처음 마음 변하지 않기를 다짐하며 이제는 속 깊은 마음공부를 하는 전무출신으로 교화자로 거듭나기 위해 '오늘도 얼굴엔 미소 가득, 마음엔 사랑 가득, 손길엔 은혜 가득'이라 외치며 하루를 보낸다.

/광양시장애인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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