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삼학은 우리 삶을 이끌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영육쌍전의 견지에서 정신의 일심·알음알이·실행과 육신의 의식주를 육대강령이라 하고 본말을 구분한다. 말이 마차를 이끌듯이 삼학이 인생을 운영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삼학의 주체는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다. 텅 비어 있으면서도 신령스럽게 아는 자신의 마음이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한다고 생각해 보자. 운전석에 앉으면 눈으로 자동차의 거울이나 창을 통해 모든 상황을 확인한다. 그 외 모든 감각기관 또한 운전하는 마음과 하나가 된다. 마침내 운전자와 자동차는 일체가 된다. 이것이 일심이다. 이 순간에는 선정에 든 것과 다름이 없다. 그는 가장 안전한 운전을 위해 편안한 자세로 호흡을 하며, 주변의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운전하는 동안 운전자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통찰하고 지시한다. 먼저 배워서 알고 있는 도로상의 법규를 실천하고자 한다. 때로는 화가 날 때도 있다. 안전거리를 확보했는데도 다른 차량이 끼어든다거나 깜빡이를 켜지 않고 좌우로 이동한다든가 뒤에서 근접 운전을 하는 경우 방어하기 위해 온몸을 활용한다. 특히 폭주하는 차량을 볼 때 집중도가 높아진다. 운전 중에 이러한 상황들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마음은 저절로 작동하는 마음의 알음알이이다.

운전자는 실제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하고 있다. 마음이 안정될수록 안전운전을 할 수 있다. 고요한 마음으로 고속도로 위 모든 차량의 흐름을 읽는다. 가족을 태우고 있다면 이들의 안전을 위해 공적영지의 정혜는 더욱 깊어진다. 욕심내서 과속하지 않고, 다른 차량들의 무례에 화를 참으면서도 무사 운전을 중심에 둔다. 우리 삶이 이와 같지 않을까. 삼학은 수행의 최종 관문인 탐진치 삼독심을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삼학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사람은 안전운전을 하면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심지어는 블루투스를 통해 전 세계 누구와도 사업얘기를 할 수도 있다. 내비게이션의 정보를 읽고 판단해서 교통흐름이 원활한 곳으로 우회해서 목적지까지 더욱 빠르게 간다. 교통사고를 발견하면 차를 멈추고, 경찰이 올 때까지 현장을 지휘할 수도 있다. 삼학을 굴리는 인생의 운전은 이처럼 자유자재하다.

아무리 좋은 차를 몰고 있어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량의 흐름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부와 명예도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는 가운데 있다. 법규를 넘어선 과속은 주위 운전자들의 마음을 찌푸리게 한다. 상규를 벗어난 사람은 역시 이웃이 용납하지 않는다. 함께 달리고 있어도 목적지는 다르다. 더불어 살지만 각자의 개성에 따라 그 취하는 바가 다르다. 차의 깜빡이나 손을 활용해 주위에 미안함이나 감사함을 표시하기도 한다. 아무리 바쁜 생활일지라도 주위 인연들에게 미안하거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는다.

출발했으면 반드시 종착점이 있다. 인생은 이처럼 시작과 끝이 있으며 끝나갈 무렵이 되면 무사한 삶의 운전에 안도감을 내쉰다. 그러나 때로 어떤 사람들은 목적지로 가는 도중 불행한 일을 맞이하기도 한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삼학을 더욱 깊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7년 12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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