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 출가자들이 스승의 날을 맞아 경산종법사를 찾아 감사인사를 전했다. 〈성가〉 162장 자비로운 스승님께는 김동진 작곡으로 원기75년 교화훈련부에서 성가로 제정했다.
청법가, 법 듣는 사람·법 설하는 사람 모두 소중히 여기고 받드는 설법 문화 꿈 꿔
자비로운 스승님께 법을 간절히 청하는 심경으로 불러야…진정성 어린 마음 중요

162장) 자비로운 스승님께(法을 說하소서)
손정윤 작사 / 김동진 작곡

1. 자비로운 스승님께 법문을 청합니다
공경과 정성으로 법문을 청합니다
지혜등불 밝혀줄 법을 설하소서
한 마음 찾아갈 법을 설하소서

2. 밝으신 스승님께 법문을 청합니다.
공경과 정성으로 법문을 청합니다
바른 길을 찾아갈 법을 설하소서
만 생령 건져 줄 법을 설하소서

새 성가의 결어

〈성가〉162장 자비로운 스승님께는 손정윤 교무가 작사한 노래로 법을 청하는 청법가이다. 이 청법가는 〈원불교성가〉 제12부 '교화'의 결어이다. 즉 127장에서 162장으로 이어지는 새성가를 매듭짓는 곡이다. 손정윤 교무는 교당을 방문할 때마다 어느 때는 법 높은 법사가 와서 설법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갓 출가한 간사나 이제 막 교화의 길에 들어선 초임 교무가 감상담이나 설교를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때 법을 듣는 사람이든 법을 설하는 사람이든 다 법을 소중히 여기고 받드는 설법문화가 꽃피기를 바라는 마음에 청법가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초임교무가 설교를 해도 마치 법 높은 스승님이 법설을 하듯이 받들고, 초임교무는 법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소태산 대종사의 대행자라는 심정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설교하자는 것이다. 특히 법을 들을 때면 법을 설하는 자의 법위가 어찌 되었든 설법을 소중히 여기고 받들자는 심정에 기연하여 '청법가'를 짓게 된 것이다.

권청과 설법의례

〈예전〉의 설법의례를 보면 설법에 대한 권청(勸請)과 그에 따른 예절을 살펴볼 수 있다.
1. 법계(法階) 정사(正師) 이상 된 분을 법사(法師)라 하고, 그 분이 법을 설함을 설법(說法)이라 하고, 그 분의 설한 바를 법설(法說)이라 할 것이요 2. 법사가 설법을 하게 될 때에는, 법상(法床)을 미리 정비하고, 대중이 일제히 설법 장소에 회집하며, 사회는 예행 순서를 밟은 다음 법사 앞에 나아가 설법 하시기를 권청할 것이요 3. 법사가 법상에 오르면 대중은 일제히 합장 경례하고 청법(聽法)하며, 법사가 설법을 마치면 또한 일제히 합장 경례할 것이니라.

〈예전〉의 설법의례에 의하면 정사 이상 되는 분은 법사로써 이 분들이 설법을 하면 법상을 마련하고 법을 설해 주시기를 청하는 권청 및 합장 경례의 예를 올리라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27년(1942) 겨울 교무선(敎務禪) 중에서 자신이 쓰는 법상보다 약간 작은 법상을 만들어 오게 한 다음 정산종사를 그 법상에 앉히어 설법하도록 한다. 소태산 대종사의 승좌설법을 정산종사가 이어 받아 승좌설법하게 한 것이다.

법사 이상 되는 분의 승좌설법과 청법의례는 결국 그 만한 법을 설할 능력을 갖춘 법위향상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청법가를 불러드릴 수 있는 법력 갖춘 도인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할 것이며, 천여래 만보살이 이 승좌설법과 청법가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 당대의 〈예전〉 '학위승급례'(현 법위승급식)를 보면 "법강항마부에 승급될 때는 유리(琉璃)증패와 법장(法杖)과 법복과 법호를 수여할 것이며, 출가부에 승급될 때는 은증패(銀贈牌)와 출가기(出家旗)를 수여할 것이며, 대각여래부에 승급될 때는 금증패(金贈牌)와 대각기(大覺旗)를 수여함"이라 제시되어 있다. 특히 법강항마부(현 법강항마위)에 오르면 법장(法杖)을 수여하도록 한 점이다. 법장을 수여한다는 것은 승좌설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법장은 법의 상징이요 법설의 증표이다.

이러한 법장을 수여받을 법위를 갖춰 승급할 때 자연스럽게 대중의 존중을 받고, 법좌에 받들어 모시는 승좌 문화가 꽃피게 될 것이다.

법을 설하소서

일반적으로 정사(正師) 이상이 법을 설하면 설법이라 하고 정사 이전은 설교라 통칭한다. 정사 이상 되어야 법이 되는 것이다. 정사 이전은 일반적인 가르침이라면 법사가 되면 그 분이 설하는 것은 법이 되는 것이다. 보통급으로부터 특신급을 거쳐 법마상전급에 이르는 삼급(三級)에서는 법을 받들어 법대로 배워 설한다면, 법강항마위 이상의 삼위(三位)는 스스로 법과 하나가 되고 더 나아가 법을 생산하게 된다. 그러므로 법을 가르치는 설교나 법을 생산하는 설법이 다 진리를 밝히는 데는 같지만, 다만 법을 자기화해 생산해 낼 수 있냐는 유무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법강항마위부터는 법이 백전백승하는 법력을 가지기 때문에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어 일동일정이 다 법이 되며, 특히 출가위 이상은 대소유무의 이치에 따라 시비이해를 건설하여 모든 것을 다 법으로 살려내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법을 가진 존재, 법사는 '자비로운 스승'이요 '밝으신 스승님'이다. 그러니 '공경과 정성'으로 법문을 청해야 할 것이다. 법을 가진 스승은 '지혜의 등불'을 밝혀주고 '바른 길'을 찾아갈 법을 설해 주시며, 또한 '한 마음 찾아갈', '만 생령 건져 줄'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청법가로 모셔야 할 자리

그렇다면 법은 무엇인가. 소태산 대종사는 청정 법신불은 태극, 무극, 자연, 도이며 이는 부처님의 심체로 천지만물의 본원이요 언어도단의 입정처로 이를 일원상으로 총칭한다.(〈대종경〉교의품3장) 결국 법의 당체인 법신불은 일원상으로 진리이며 도인 것이다. 이 진리에 바탕하여 교법이 발생하는 것이다. 법은 진리 당체이면서 그 진리에 바탕한 교법이다.

법이란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로써, 법을 설한다는 것은 도의 원리를 알아서 덕을 드러내는 것이다.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를 닦아서 현실에서 덕을 나투는 것으로, 이렇게 도를 통해 덕을 꽃피울 때 낙원이 펼쳐지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진리요 도인 법을 밝히어 교법을 제정해 주시고 있다. 일원상의 진리(일원대도)에 근거해서 사은사요 삼학팔조의 교법을 밝혀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법은 진리의 뜻이며 법보(法寶)로써, 이 교법에는 주세불이신 소태산 대종사의 태양 같은 지혜와 자비 그리고 포부와 경륜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교법은 빛과 은혜의 보고요 낙원건설의 원리인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대로 실천하면 법이 되는 것이다. 교법대로 하면 도가 밝아지고 법이 되는 것이다. 좌산상사는 법문이란 마땅히 밝아나가야 하는 길이며, 앞길을 대낮같이 밝혀주는 빛이며, 얼음장 같은 묵은 업장을 녹여내는 위력을 가진 열이며 활용하는 대로 무한 복이 나오는 보고로써 구원의 원리와 소재가 되는 제생의세의 약재라 정의하고 있다.(〈교법의 현실구현〉)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대로 배우고 실천하고 가르치면 그것이 법이 되는 것이다. 소태산 스승님을 믿고 따르며 소태산 대종사의 법에 따라 창조적으로 실천하면 청법가를 불러 모셔야 할 것이다. 법이 시대화·대중화·생활화 되는 그 자리가 청법가로 모셔야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스승님께 청법가를 간절한 마음으로 불러드리고 싶다.

원음 산책

〈성가〉 162장 자비로운 스승님께를 듣노라면 천지의 기운을 길게 들어 마시고 천천히 뱉고 또 다시 깊게 들이쉬고 허공을 향해 길게 내뱉는 느낌이다.

〈성가〉 162장은 3/4박자의 노래로 성스러운 분위기의 노래이다. 클라이막스는 내용상에는 중간부분의 '법을 설하소서'에 있으나 감정상에는 시작하는 첫 소절의 첫 마디인 '자비로운 스승님께'에 있는 듯하다. 정말 자비로운 스승님에게 법을 간절히 청하는 마음으로 불러야할 것이다. 시작하는 '자비로운 스승님께'의 음은 낮으나 마음을 모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처음의 8마디에 전체적인 분위기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8마디를 간절히 부르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노래의 감정이 흘러갈 것이다.

'법을 설하소서'의 청법가는 앞에 스승님을 모시고 법을 청하는 노래이기에 스승을 모시는 진지하고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진정성이 없게 되어 결례가 되기 때문이다.

〈성가〉 162장 자비로운 스승님께는 음의 높낮이 차이가 작고 각 소절의 음색이 비슷해 단조로울 수 있으나 부르는 마음에 따라 그 작은 차이에서 음감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 곡은 붓점을 살려서 불러야 노래의 맛이 난다. 모든 소절마다 있는 붓점을 청법의 마음으로 강조해서 불러야 할 것이다. 특히 '법문--을' '법을---'의 붓점을 잘 살릴 때 청법의 맛이 훨씬 간절해지고 진지해 질 것이다. 가사에 있어서는 '법문을 청합니다'로 시작해서 '법을 설하소서'로 마무리하는 '법문'과 '법'의 차이에 유의해서 불러야 할 것이다.

〈성가〉 162장 자비로운 스승님께는 김동진 작곡으로 원기75년(1990) 교화부에서 성가로 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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