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민족종교 박멸정책…소태산 대종사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천하농판 심법으로 상대해
황도불교화 강행에 당신의 열반으로 대처…게송·의발 공전, 공화주의로 후래사 당부
원불교, 불교의 1부처 1미륵이 아닌 천여래 만보살 경륜…종통주의 아닌 공화주의 지향해야

불법연구회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자존의 긍지를 갖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민족종교다. 한말 풍전등화 급변기에 후천개벽 성자로 수운·증산·소태산이 연이어 출현하였다. 수운과 증산은 한일합방 이전의 선지자요 소태산은 일제강점기의 험난한 시국에 대처한 지도자다.

유불선에 달통한 역학자 문자삼(文子三)은 구수산을 명산으로 알고 정착한 길룡리 6걸의 우두머리로, 그를 따르는 박성삼의 셋째아들에게 처처교화(處處敎化) 즉 당처에 잘 대응하는 것이 교화라며 '처화'라는 자(字)를 주었다.

처화는 도사소설을 읽고 조선 최고의 도사를 찾는다. 한번 기다 싶으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처화는 3년간 150리 길을 증산문하에 끈질기게 내왕한다. 증산은 영광소년에게 곁을 주지 않았으나 처화는 증산의 말씀이 자신의 앞날을 예시하는 메시지란 걸 안다.

사람들은 증산을 광인으로 보았다.
"이 시대를 지내려면 남에게 폭을 잡히지 않아야 한다. 너희는 나처럼 광인이 되지 못하니 농판(멍청이)으로 행세하라." 이 말씀은 소태산의 일제강점기 대처비결이 되었다.

뜻 있게 살면 천하농판
일제는 조선의 민족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저네들의 토속신앙 신도(神道)와 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고 그 외는 유사종교라 박해했다. 단군왕검을 교조로 모시는 대종교는 국외로 나가 만주 백두산 아래 청파호에 본부를 두고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주력하였다. 청산리전투에서 대첩을 거두었으나 이후 동포 수천 명이 학살당하고, 일제말기에는 교주를 비롯 24명이 입건돼 간부 10명이 고문으로 옥사당하였다.

동학은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활보하였다. 한때 650만 신도를 헤아리던 보천교는 일제의 사찰과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친일하여 시국대동단으로 행세하다가 1936년에 폐쇄되었다.

일제의 압제는 갈수록 가중되었다. 경찰조사가 심할 때에 소태산은 "어이구, 이눔들 징하다"며 상기증으로 몹시 고생했다. 일제의 조직과 위세는 일개 면서기나 순사가 단체 하나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했다. 내선일체, 징병모집 등 시국강연회 강사로 종법사를 강제하면 "지가 무얼 압네까. 지도혀 주시요이"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렸다. 풍채가 그럴 듯한 분이 못난 체하니 그들은 '농판영감'으로 알고 돌아갔다.

소태산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일제를 상대하였다. 보은·감사·온건·착실을 생활신조로 대중을 지도했다. 속없이 일제에 당하는 농판이 되지 말고 뜻이 있게 하면 천하농판이다.

경무국, 조선의 간디로 지목 암살계획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나를 '조선의 간디'라 지목하면서 제거해야 된다고 극력 주장한다는구나. 경무국에서도 더 크기 전에 불법연구회를 조처해야 후환이 없을 것이라 방침을 세웠더란다. 앞으로 환장하는 무리가 더러 있을 터인데 그 목을 넘기기가 힘들 것이다."

백백교사건 이후 민족종교는 사실상 말살되어 지하로 잠적하고, 불교계 유사종교로 분류된 불법연구회는 불교냐 사이비냐 사찰 대상이 되었다. 총독부 경무국은 조동종 원로 우에노 쥰에이를 익산총부에 파견시켜 불법연구회를 내사하였다.

우에노는 1주일간 사찰 끝에 '인류사회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는 교리'라며 '조동종의 종조 도겐(道元)보다 수승한 스승'이라 극찬하였다. 이후 일제는 불법연구회를 황도불교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에 대처하는 길이 소태산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그들의 관심을 무화시킬 작정이었다.

소태산은 초기회중 건설에 애쓴 제자들을 불러 겸상하며 "내가 멀리 가서 쉬어야야겠다"고 새 법복을 주었다. 소태산은 세상을 떠나기 16개월 전에 대중을 공회당에 모아놓고 마지막 게송을 설하였다.

열반을 한 달여 앞둔 시창28년 총회 무렵 소태산은 마치 여행을 앞둔 학동처럼 하루에도 수차례 세탁부에 와서 법복 짓기를 재촉하여 재가출가 구분없이 고루 나눠주었다. 2년여에 걸쳐 제작된 200여 벌의 검정 법복은 소태산 장례식에 상복이 되었다.

"어이고 이눔들 징하다" 종사주께서 누구에게 하는 말씀인지 각자 반성해보자.

종통주의냐 공화주의냐
겉으로는 그들에게 굴종하며 안심시키는 한편, 안으론 무섭도록 올곧음을 곧추세웠다. 소태산은 〈정전〉 솔성요론 1조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어라" 강조하였다. 정의이어든 죽기로써 행하고 불의는 죽기로써 하지 말라고 하였다. 등상불 내지 인격숭배를 배격하고 법신불(眞理) 수행과 신앙을 강조하였다. 한 개인이 전횡하는 종통주의(宗統主義)를 경계함과 아울러 모든 법은 민중에서 나온다는 주법재민(主法在民)에 근거한 천여래 만보살 사상인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표어로 올렸다.

5월16일 예회가 끝나고 점심 때 소태산은 조실에서 굴젓에 상치쌈을 맛있게 든 후 때마침 도착한 우편물을 점검하고 각 부서에 보냈다. 소태산은 큰 뜻을 결정한 것처럼 엄지손가락으로 방바닥에 글자를 몇 자 쓰며 "여자들 때문에 탈이다"는 말을 연거푸 두세 번하고 한동안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자리에 누웠다. 5월27일 저녁 8시반경에 이리병원에 입원하였다.
1943년 6월1일, 이리경찰서 황가봉 순사가 이리병원에 왔다.

"2, 3일 전 경찰서장 회의가 있었다던데 무슨 회의였던가?"
"대동아전쟁을 위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전력에 총집중하라는 회의지 다른 일이 있겠어요."
"우리에 대한 말은 없던가?"
"불법연구회에 대해서는 별 말 없었습니다."
"이천, 세상은 허망한 거야. 식은밥 한 덩이가 그리 큰 게 아니여."

식은밥은 일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식은밥이 절묘한 구미를 내는 것은 찬물 한 그릇에 말아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것이다. 식은 밥이 때를 넘기면 쉰밥이 되기 마련이다.

이리병원에서 경찰서까지 300m 거리다. 황 순사가 문을 열고 막 들어서는데 전화가 따르릉 울려 받아보니 불법연구회 종법사 박중빈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즉시 서장에게 보고하니 이리경찰서는 경사가 난 것처럼 왁자지껄하였다.

1부처 1미륵이 아니라 천여래 만보살 사상
소태산은 게송도 공전(公傳), 의발도 공전하여 후계 종법사를 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키워드는 시창3년 이전에 남긴 법의대전 <완전송추허부당래사(完田宋樞許付當來事)>이다. 첨에는 '완전한 송추에게 당래사를 허부한다'로 알려졌다. 송추는 누구인가. 송규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근거 없는 주장이다. 정산은 규성(奎星)이다. 28수의 15번째 문성(文星)으로 이 별이 나오면 밝은 세상이 된다고 한다. 추성(樞星)은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이다. 1인 1성(星), 한 사람에게 두 개의 영혼이 있을 수 없다.

추(樞)는 별이 아니라 이 예언을 푸는 키포인트이다. 추는 가톨릭의 추기경 중추(中樞) 용례에서 보듯이 문과 문설주의 문지도리 연결고리로써 문을 여닫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소태산 열반 당시 회중의 중추역할을 하는 3인이 완·전·송(完·田·宋)이었다.

가장 인망이 도타운 이는 단연 주산 송도성(宋)이고, 그 다음은 소태산의 장남 박광전(田), 그리고 전국 20개 교당 가운데 가장 탄력성을 보인 용신지부 박대완 교무(完)를 들 수 있다. 완·전·송은 1인의 독점을 경계한 것이다. 수위단원은 회중의 모범되는 인물이다. 교조 재세시에는 수위단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나 교조 멸후의 상황은 다르다. 회중사를 교단 공동대표(首位團員)들이 서로 상의하고 공론화하여 경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불교는 일불설(一佛說)이다. 불멸 이후 33조사로 계속 법맥을 이어왔다. 소태산의 경륜은 미륵사상이다. 불교처럼 1부처 1미륵이 아니라 처처불(處處佛) 천여래 만보살 경륜이다. 종통주의가 아니라 공화주의다. 우리 회상의 교운을 예시한 〈정산종사 법어〉 도운편 25장을 음미해보자.

"이 세상이 공화의 정신을 가진다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무엇이리요. 우리는 세상을 상대할 때에 권리를 독점하려 하지 말며, 이익을 독점하려 하지 말며, 명예를 독점하려 하지 말며, 대우를 독점하려 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공화가 되어 평화는 자연히 성립되리라."

/교화훈련부 

[2017년 12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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