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대자대비한 부처님과의 인연을 법연(法緣)이라 했다. 정산종사도 "혈연과 법연이 다 소중하나 영생을 놓고 볼 때에는 법연이 더 소중하다"며 부처님 인연을 중요시 했다. 그런데 그 법연이 얼마나 두터워야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는 은혜를 입을 수 있을까. 시산 김정관(86·侍山 金正貫·대봉도) 원로교무가 그랬다. 그것도 정산종사가 친히 "같이 살자"고 이끌어 준 은혜로 말이다.

공부시켜 준다고 하니까
영광 묘량면 삼학리에서 태어난 김 원로교무는 집안이 가난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진학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난한 집안 사정이 훗날 그에게 커다란 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김 원로교무 집안은 원불교 법연이 깊었다. 모친 옥타원 민천일옥 정사는 소태산 대종사를 직접 뵙고 신흥교당을 다니고 있었다. 큰어머니와 할머니도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하게 되자 당시 교단에서 운영하는 이흥수양원(과수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일도 거들지만 글 공부도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다. 그때가 16세였다.

"16살 되던 가을에 이흥과수원에 들어가서 17세에 정식출가 했지. 거기서 형산 김홍철 법사님을 처음 뵈었어. 나보고 전무출신 안 할라냐고 물으셔. 뭔지는 모른디 공부시켜 준다고 하니까 한다고 했지."
형산 법사 옆에서 아들 같이 컸다. 한 이불에 곁에서 잠자고, 정을 듬뿍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20살즈음 되니까 군대징집 신체검사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한국전쟁 시절이라 남자는 대부분 전쟁터로 나가야 할 판이었다. 또 인민공화국이 점령할 때면 소년단이라 해서 면에서 유격대에 참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형산 법사께서 총부로 나를 데려 갔어. 당시 총부 산업부장이 성산 성정철 어른이었는데, 두 분 사이는 의형제 같으셨지. 나를 산업부에 맡기시고는 '그 양반 밑에 지도 잘 받고 있어라' 하고 가셨지."
산업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 형산 법사가 찾아와 요양하고 있던 대산종사께도 인사시켰다.
"참 내가 법연은 최상이었던 것 같애. 형산 법사께서 또 대산종사께 지도 잘 부탁드린다고 연결시켜 주셔. 그렇게 산업부에서 1~2년 살다가 3기생 유일학림 공비생으로 뽑혔지."

정산종사와 인연
정산종사와 인연은 그가 원기38년 원광대학 교학과를 다니면서부터였다. 당시 정산종사는 위암과 중풍으로 투병 중이었다. "그때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조실 청소를 했어. 정산종사는 안락의자에 앉아 계셔. 그러면 안마도 해드리고 그랬지. 그런데 나를 어떻게 잘 보셨던지 2학년 때부터는 실제로 내가 시자를 시작하게 됐어."

김 원로교무는 학교에 다닐 때에도 조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당시 시자로 범산 이공전 교무가 있었지만 원광사를 겸직했고 몸도 약해 시봉을 힘들어했다. 김 원로교무는 하나를 시키면 둘, 셋을 보고 영리하게 처리했다. 정산종사는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시봉을 전속할 정도였다.

"졸업 할 때가 되니까 동창들은 부교무로 가고, 어디 사무실로 가고 그런디. 정산종사께서 '정관아, 나하고 같이 살자' 그러시더라고. 나야 그렇게만 해준다면 더 이상 영광이 있겠어? 그래서 조실이 첫 발령지가 된 거지." 그 인연이 정산종사 열반하실 때까지 모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원기43년 종법실 앞 정원에서 정산종사를 모시고.

기발한 아이디어
김 원로교무는 정산종사를 부모로 알고 살았다. 일처리도 서툴지 않고 제법 알아서 잘 하다보니 믿어주셨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정산종사가 제일 좋아하셨던 일이 조실 뒷마루 고쳤던 일이다. "조실하고 세면장하고 떨어져 있었어. 정산종사께서 중풍을 앓으셨거든. 몸이 불편하셔서 간격도 얼마되지 않지만 항상 시자들이 그 사이를 업고 다녀야 했지. 그래서 내가 마루와 마루 사이를 이어버렸지."

정산종사는 그 사이를 업혀다니는 게 시자들에게 늘 미안했다. 또 겨울이면 시자들이 미끄러질까 봐 걱정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 원로교무의 아이디어 하나로 이러한 근심걱정이 완전히 해결된 것이다. 정산종사는 "정관이가 근심거리를 해결했다. 이제 나 혼자 세면장, 화장실을 걸어다닌다"며 총부 간부들이 모일 때면 자랑하곤 했다.

60년된 산삼의 효능
하지만 제자들의 지극한 시봉에도 정산종사 병환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른 시자였던 보산 이보원 교무는 '산삼이 명약이라 구해서 올리겠다'고 계룡산 신흥암부근에 막을 쳐놓고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김 원로교무는 그 보원 교무가 오롯히 기도에 전념하고 산삼을 발견하도록 고추장, 된장, 쌀을 갖다 대줬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다. 정산종사가 위암이 위중해지자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그 무렵 한국일보에 경상도 성주에서 산삼이 발견됐다는 광고가 났다. 60년생 산삼이었다.

"우연이 아닌갑다 그랬제. 육타원님이 시봉 총괄이셨는디 신문 들고 찾아갔지. 정산종사께는 말씀 안 드리고. 육타원님도 흔쾌히 구하자고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종로에 있는 달타원 이정화 선생에게 육타원님이 신문 보여주면서 항타원 이경순 선생에게 연락해서 얼른 구해보라고 그러셨지."

달타원은 쏜살같이 대구에 있는 항타원 언니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산삼이 있었다. 막 사고 나니 다른 서울 사람도 그 광고를 보고 사러 왔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산삼은 서울대학병원 정원 쪽 한쪽에서 범산과 함께 달였다. "정산종사께 육타원님이 올리고 자시게 했제. 효과가 나. 정산종사님 얼굴 화색이 확 돌면서 좋아지시더라니까. 광채가 나셨제."

종법실과 세면장을 연결시킨 마루 다리.

정산종사의 열반
"그 날이 국군의 날이여. 병원에서 모시고 자면 보통 5~6시에 일어나시는데 못 일어나셔. 일어나시려고 하는데 침대에서 중심을 못 잡으셔. 정산종사님이 '이거 이제 안 되겠다' 그러시는 거여."
청천벽력이었다. 위암으로 크게 고생하실 때에도 "이게 어느 정도 고통인 줄 아느냐? 바늘로 위를 꼭꼭 찌르는 것 같다"며 수양력으로 버티면서 "안된다"는 말씀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안될 것 같다"고 하신 것이다. 의사는 뇌출혈이 재발했다고 했다.

원기46년 11월 중순경 총부로 내려왔다. 정산종사가 "그냥 내려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총부에 와서 한두 달 더 계시다가 원기47년 1월24일 오전9시30분 열반하셨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정산종사 열반 후 그는 원광사 총무로 근무를 시작했다. 부도 직전까지 간 원광사를 6년 동안 살면서 다시 정상으로 되돌려놨다.

이후 원기52년 원광대학 교무과에 근무하다가, 원기56년 원광대학교 교양학부 교학과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일본어를 배우면서 일본학부 교수와 인연이 돼 원기63년 오사카교당 초대 교감으로 취임해 원불교종교법인도 취득했다. 이후 원기80년 원광보건대학 학장 등을 지내고 원기86년 퇴임했다.

후진들을 보면서
현재 정산종사를 모셨던 시봉진 가운데 '이제 혼자만 남았다'며 세월의 무상함을 살며시 내비치는 김 원로교무. 하지만 퇴임한 이후 후진들을 보면 흐뭇하다고 한다.

"후진들을 볼 때마다 참 희망을 느껴. 후진들 수준을 보면 내가 저 나이 때 저만치 이야기하고 생각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 교단이 앞서나가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정산종사께서 인재양성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 같아."

지금도 정산종사께서 말씀하신 법문과 추억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듯이.

[2017년 12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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