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정신수양은 온전한 정신의 자주력을 얻는 것이다. 그 핵심은 일심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한 마음의 산물임을 말한다. 어떤 곳에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보자. 건축을 위해서는 설계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은 집을 구상한다. 건축설계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바람대로 설계를 해줄 것이다. 그리고 시공에 들어간다.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집이 세워졌다.

그렇다면 이 집은 애초에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떠올린 집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 세계 또한 이처럼 마음이 작동해서 이뤄진 것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인 자신의 얼굴과 습관을 비롯한 모든 모습은 또한 내 마음의 행적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모든 중생이 다 일심의 유전(流轉) 아님이 없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화내는 모든 감정은 다 내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가.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온갖 형태의 감정을 내는 그 마음이 누구냐를 아는 것이다. 밖으로 쏟아내는 이 온갖 마음의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화려한 마술의 빛을 돌이켜 그 근원인 마음에게 비추는 힘, 그것이 정신의 자주력이다. 즉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힘이다.

이 마음의 근원은 본래부터 깨달아 아는 본각(本覺)이다. 중생은 그것을 모를 뿐이다. 불행은 마음이 만든 그림자를 추종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 마음은 머무는 바가 없다. 과거나 미래에도 심지어 현재에도 머물 수 없다. 무소주(無所住)가 마음의 본질이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인 것이다. 무상은 인연으로 인해 생했다가 인연으로 멸하는 세계를 말한다. 그러니 그 속에 나라고 주장할, 영원히 변화되지 않을 그 무엇이 있는가. 행복이라는 것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전진한들 그 행복은 잡히지 않는다. 불안이나 고통, 권위나 명예 등 모든 관념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 마음이 멸하면 모두 멸해지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는 이러한 마음의 산물에 도리어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것에 있다.

이처럼 한 생각 깨달으면 그 자리가 바로 법신의 자리이다. 법신은 중생의 본각이며, 이 법신의 세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일심이 법신이다. 법신 속에 삶으로써 모든 존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실은 하나마저도 없다. 오직 전체일 뿐이다. 깨달음은 이 일체를 아는 일이다. 법신을 자각한다면 이 일체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거대한 폭포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그 폭포로부터 낙하하는 한 방울의 물처럼 순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실제 우리의 본류는 폭포의 물줄기이자 그것이 합류하는 대해장강 자체이다. 우리 안의 법신은 그 본류와 하나가 되어 영원히 흘러간다.

분별심과 주착심은 이러한 우주적 생명력 앞에서는 부질없는 일이다. 분별하는 마음을 돌이킬 때 자성은 금강석처럼 빛난다. 주착하는 마음과 대상이 허공에 난무하는 실체 없는 꽃과 같음을 깨닫는다면, 그 자리가 바로 진여의 자리이자 법신의 자리이다. 티 없이 푸르른 창공을 볼 수 있다면, 이미 그는 마음의 평화인 열반을 이룬 것이다. 그는 태양처럼 빛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산다. 주관과 객관은 없으며, 나와 너도 없다. 오직 모든 존재는 부처임을 자증(自證)하는 각각의 주인공이다.

/원광대학교

[2017년 12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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