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신문의 성격과 방향

원불교에서는 금번에 「원불교 신보를 설립하고 원불교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41년전 소태산 대종사 종교에 있어서 매스콤은 必要不可欠한 교화수단임을 인지하시고 어려움이 많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月末通信」을 창간하여 월1회 정기적으로 발행했던 것을 생각하면 오늘의 원불교신문 창간은 너무나 때늦은 감을 준다. 그러나 젊은 원불교의 양양한 미래을 전망한다면 원불교신문 창간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지난 3월 24일 「원불교신보사」에서는 신문창간호를 발행하기에 앞서 「종교와 매스콤」이라는 주제아래 특히 종교신문의 성격과 방향에 대하여 좌담회를 가졌는데 여기에 그 내용을 수록한다. ....(편집자)....

참석자 朴權相(동아일보 편집부국장), 柳炳德(원광대교수ㆍ종교문제 연구소장), 李箕永(동국대 교수ㆍ문학박사), 趙年九(사회ㆍ본사 편집국장)
장소 : 원불교 종로지부
기록 : 이성은 기자

▲趙-바쁘신데도 이렇게 나와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희 원불교에서는 이번에 「원불교 신문」을 창간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창간에 앞서서 여러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종교와 매스콤」에 대해서 특히 종교신문의 성격이랄지 방향 이런데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먼저 매스콤의 본질과 매스콤이 지니는 기능에 관해서 朴 선생님께서 좀 말씀해 주시지요.
▲朴-한마디로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종교가 힘을 많이 발휘하던 시대, 물론 지금 이라고 적게 발휘하는건 아니지만 역사에서 본다면 기독교 교권이 남용되던 중세기 같은 때 아무튼 전통사회랄까 전근대사회에는 오늘날 말하는 매스콤은 없었습니다. 매스콤이 없으니까 거기서 오는 매스?미디어도 없었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코뮤니케이숀 형태 자체가 인간의 형을 어느 정도 규정하고 또한 사회유형을 규정하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자가 나오기 전 시대에는 매스콤이란 없었고 15~16세기경 신문이 생길 때 만 하여도 아무도 매스콤이라고 말하지는 안 했습니다. 그것은 극히 제한된 내용 제한된 수량을 제한된 사람에게 전하는 코뮤니케이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스콤이라고 하면 인쇄물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져서 대량의 정신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코뮤니케이숀을 뜻하고 이러한 역할을 하는 기술적 필수수단 즉 신문 잡지등의 인쇄매체 그리고 래디오 테레비 영화 등의 전기매체를 매스?미디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매스콤시대가 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매스콤의 기능도 어느 정도 분명해질 것입니다.
즉 매스콤이 없던 전근대사회의 인간형 또는 사회유형이란 좁은 어떤 집단에 파묻혀 기존하는 가치체계라던가 사회규범에 복종해서 사는 인간유형이었다고 하겠고 그런 사회에서는 매스콤은 필요 없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mouth to mouth) 코뮤니케이숀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 오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여러 가지 사회 일에 대해서 자기의 五官으로 직접 접촉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고 오히려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비중이 더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스콤의 기능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직접 접하지 않고 있는 외부세계를 그대로 정확히 알려줌으로써 현대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회에 적응할 것인가를 도와주고 지침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趙-네. 지금 朴 선생님께서는 일반 매스콤의 기능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柳 교수님께서 종교적 매스콤의 특성 또는 종교적 매스콤이 지녀야 할 윤리 같은 것이 강조될 점이 있으시면 간단히 말씀해 주시지요.


▲柳-저는 대학에서 대학신문을 편집 좀 하긴 했지만 매스콤을 다뤘다고 할 순 없고 하여간 종교적 매스콤이라는 그런 단어가 개념 지어진 어떤 분야로 얼른 납득되지도 않습니다.
다만 생각된다면 지금 朴 선생님께서 일반 매스콤에 대해서 잘 말씀해 주셨는데 확실히 매스콤에 의해서 사회가 축소되고 인간의 생활이 편리해진 것만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따라서 종교의 본질과 관계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인간성이랄까 인격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도 사실인데 제가 볼 적에는 현대 매스콤의 매스?미디어의 작용에 의해서 인간성의 영역이 여지없이 도매금화 된다고 보아집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성격이 그저 안이하게 지어져 나간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역사의 이면을 훑어보면 되어진 상태에 순응하는 자세라기 보다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창조하려는 어떤 정신적인 역할이 계속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와 매스콤은 어떤 면으로 양적인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러나 종교는 정신적으로 인간 이상의 그 어떤 것을 설정하고 노력하는가하면 매스콤은 아주 현실적인 면에 입각해서 종교에서 말한다면 육적인 면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인간의 생활을 도우니까 종교는 자꾸 승화해서 마치 사회에서 조화를 가져오지 못한 그런게 있는 것 같은데 그 때문에 종교적 매스콤의 성격 같은 것은 아직 제시 될 수도 없거니와 잘 모르겠고 종교와 매스콤이 어떻게 접합 될 수 있는가 그런 방향을 李 박사님께서 좀….


▲李- 글쎄요. 거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해 주셔서….


▲朴- 그러니까 반론은 아니지만 제 의견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상극이라고 보지는 않구요.


▲柳- 예.


▲朴- 일치되는 점이 있습니다. 물론 일치 안 되는 점도 있고…. 제가 종교인도 아니고 또 공부한 사이도 아니면서 종교 자체를 규정짓는다는 것은 당돌합니다만 아무튼 종교는 정신세계를 다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신문은 현대인에 있어서 땔 수 없는 정신적 영양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나 쓰나 매일아침 저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사고와 행동의 재료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신문이 본질적으로 상업주의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잘 읽는 기사 가령 종족보존의 본능에서 발휘되는 로맨스라던가 섹스 문제 무슨 스캔들 등등 그리고 자기 보존의 본능에서의 기사를 쓰게됩니다. 사실 영국처럼 교육도 높고 국민성도 점잖은 나라에서도 세계 신문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런던타임즈」 같은 신문은 5천만 인구 중에서 약30만부 팔리지만 다른 쎈세이쇼날한 신문은 4~5백만부씩 팔립니다. 이런걸 보아도 정말 신문다운 신문을 읽는 사람은 적다는 얘기가 되겠죠. 이와같이 상업주의로해서 매스콤이 본위하게 된다면 종교신문은 본질적으로 상업주의와는 관련이 없는거지요.
가령 종교신문의 예를 든다면 미국에서 나오는 기독교파의 기관지로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라는 신문이 있는데 약10만부밖에 발행되지는 않지만 신문으로서의 지위는 세계 10대신문에 꼽히는 정도입니다. 이 신문의 특색은 섹스라던가 살인 죄악은 일체 없고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깊이 있는 해설을 하기 때문에 붓수는 적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이러한 고급 신문을 보통 「크올리티 페이퍼」 그리고 좀 지저분한 신문을 「퍼퓰러 페이퍼」라고 하는데 앞으로 종교신문은 진정한 「크올리티 페이퍼」로서 상업주의 신문의 폐습이라고 할까 이런 것을 좀 시정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느낌이 듭니다.


▲柳- 거기에 덧붙여서 李 박사님께서 외국의 종교신문과 한국의 종교신문을 비교하면서 말씀해 주실까요?


▲李- 글쎄요. 뭐 외국의 종교신문이라면 벨지움의 「라리브 벨지크」라는 카톨릭에서 하는 신문이 있는데 종교인 색채는 없고 일간지로 상업신문입니다. 그리고 벨지움의 종교신문들은 상당히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란서에 오면 전연 다릅니다. 「데모니아 크레치안」이라는 기독교 신문은 우리나라의 「주간조선」 정도인데 퍽 쎈세이쇼날하고 선동적인데도 종교적인 품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업적인 효과도 거둔 케이스라고 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라꾸아」라는 신문은 성직자들이 많이 집필하는 것 같은데 기사가 고루하고 좀 傾向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주부들이 사서보는 그러한 신문정도로 낙인이 찍히고 있었습니다. 역시 종교면에 있어서 가장 정확한 지식을 얻으려면 세계적으로 알려진 「르몽드」나 「꽁바」라는 신문을 보게 되는데 이 신문들은 논설이나 칼럼을 맡은 사람들이 아주 거물들이고 철학?예술?오페라?영화?연극 등에는 인류가는 해설과 무게있는 논평을 싣는 것이 특색인데 종교 일변도로 나가지는 안 했습니다. 다음으로 카톨릭계에서 나오는 격주간으로 「인터내쇼날 카톨릭 인포메이숀」이란 신문이 있는데 상당히 진보적이며 기사 다루는 모습이 아주 객관적인걸 보았습니다. 조금도 감추는게 없이 있는 것 구대로 기사를 쓰니까 그 신문을 보면 불란서 종교계 사정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종교계 구멍도 그대로 드러나요. 사실 교회안에서의 내부 갈등이란 참 심합니다. 지금 그걸 그대로 소개하면 한국 종교계도 그대로 불이 붙으리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그런 것은 들춰내어야지요. 이건 너무 깜깜해서 권위주의를 그대로 부리고….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하고 있는 신문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종교신문 다운 종교신문은 하나도 없잖습니까?
柳- 예. 지금 박 선생님께서는 영미계통 그리고 李박사님께서는 구라파의 종교신문들을 퍽 참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이제 좀 좁혀 가지고 우리나라에서는 종교 매스콤이라고 하는 성격이 어떻게 돼야할 것인가- 지금 다소 제시는 됐읍니다만 - 李박사님께서 자기 종교를 고발할 수 있는 자세를 말씀하셨는데 저도 항상 그런걸 느낍니다만 종교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하는데 지금 종교는 자꾸 자기성을 쌓고 또 그것을 굳히려는 작업을 계속하는데 현대 문명 속에서 사는 비종교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밖에서 성을 부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종교 안에서 그 성을 부수고 나오려는 그런 움직임 같은게 있어야 종교는 새로워 질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인데 그게 과연 매스?콤을 통해서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지.-


▲朴- 예. 그것이 신문입장으로서도 두 가지 면으로 이율배반에 봉착합니다. 하나는 상업주의 입장에서 볼 때 싸우고 치고 박고 시끄러운 것들을 충분히 살립니다. 또 한가지는 종교와 신문간에 공통적인 것입니다만 국가에 따라서 「피스메이커」(Peacemaker)야 한다는 사명이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신문은 코뮤니케이숀을 업으로 하는데 수준도 다른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기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코뮤니케이트한다는 것 대단히 까다롭고 어려운 직업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한 개인과 다른 개인 한 집단과 다른 집단 또는 어떤 정당과 어떤 정당의 사정을 私的으로 옮겨도 不和를 붙이는 건데 하물며 공개적으로 떠벌이면 정말 이건 원수 척을 만드는 겁니다. 이미 활자화되어 버리면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쓸 수도 없는 것이죠. 가령 A라는 정당이 B라는 정당을 욕하면 욕한다고 쓸것이고 반대로  B가 A를 욕하면 욕한다고 씁니다만 본질적으로 신문의 사명감에서 볼 때는 그 두 집단간에 이해를 촉구하고 화해를 촉구해야지요. 동양의 옛말에 和而不同이라 던가 同而不和라던가 이런 말이 있듯이 서로 같지 않으면서 그러나 서로 화해할 수 이Yrp 되어야 민주주의 사회가 wpp대로 되는 것인데 요즘 우리 사회는 거구로도 同而不和, 즉 똑같은 생각을 가지면서도 순전히 화합을 못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반영하는게 신문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신문으로서는 되도록 和而不同 서로 뜻이 같지 않고 이해가 다르지만 그것을 서로 화하게 만드는 그런 「피스 메이커」의 입장에 있으니까 종교문제 같은건…. 특히 종교는 어느 의미에서는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그냥 믿으니까 믿는 거고 오라니까 오는 것이지 그것이 논리를 가지고 설명하기는 퍽 어려운 대목이라고 생각되는데요.


▲李-거기에 대해서 제가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서양 종교를 기독교 회교 또 기독교의 여러 파들이 그런 성격을 가졌다고 보아지는데 불교는 - 원불교도 그렇지마는 - 교리 상으로 보아서 절대로 그럴 수 없게끔 되었습니다. 그거는 오히려 불교가 아니라고 때리고 있는게 불교예요. 특히 원불교는 그거를 지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지금 원불교가 의도하는 종교신문은 과거의 종교들이 가졌던 그런 경향하고는 달라지는 신문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퍼내틱하게 자기네 신조나 자꾸 선전하고 이런다면 뭐 또 하나 생겼구나 그런 정도이지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돼요. 적어도 원불교에서 신문을 만든다면 종교적 쇼비니즘(Chauvinisme) 종교적 퍼내티시즘(Fanaticism) 이런 것이 없어지는 방향에서 종교란 이런 거다 과거 우리의 종교적 감정은, 그것은 감정이지 종교는 아니다 이렇게 상당히 인스트럭티브(instructive)하게,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재의 선택도 필요하겠고, 아까 제가 정확하게 폭로적인 그러한 면도 얘기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원불교의 출판물도 보면 원불교 원불교하고 너무 내세우는데 그러지 말고 진리를 내 세우세요 진리를….


▲趙- 예.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렇잖아도 우리 신문이 지녀야할 자세나 그 방향을 물으려 했는데 이렇게 소상하니….


▲李- 뭘 물으려는지 몰라도 먼저 다 해놓고….(웃음)


▲朴- 신문하면 저널리즘이라고 할까 이건 본질적으로 시사적인데 원불교신문이라면 원불교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등을 정확히 가능하면 신속히 그러나 신속보다는 정확이 중요하니까 아주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우(????)  에서 서로 비판할 수 있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도록 즉 원불교 사회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승화한다고 할까 발전시키는데 그 「퍼브릭 포럼(Public forum)」이랄까요 「퍼브릭 포럼」의 성격으로써 좋은 의견 견해들을 실어줌으로써 전체에 기여하는 이것을 조금 확장해 가면 원불교 전체 또는 종교계 전체 또는 이 사회 전체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 두 가지는 그것이 학교신문이 되었건 종교신문이 되었건 무슨 노동자신문이 되었던간에 신문이라는 두 글자가 져널리즘이라는 성격을 띤다면 지금 말한 그 환경을 제대로 제시해 주는 것. 그 다음에 어떤 특정 문제에 우리가 어떻게 적응해야 할 것이냐, 여기에 어떤 처방을 내려야 되는데 처방은 신문사 자체가 사설로 내 줄수도 있겠지만 기타 각계의 이해가 상충되는 여러 의견을 제시해 줌으로써 답을 얻을 수 있는 그러한 媒體, 媒體가 될 적에 원불교 신문이 제대로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학교신문을 볼 때 늘 불만이 그겁니다. 대학 교수님 글 하나 푹 싣고 그리고 어떤 학생이 작품하나 싣고 이런데 태반이요. - 요새 좀 나아졌습니다만- 그렇다면 그거는 본질적으로 신문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학술잡지가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고 다른 간행물이 될 수 있지 적어도 대학신문 일 때는 수천명의 학생 교수 거기에 딸린 가족들의 인정가화랄지 또는 학교운영의 정책적인 문제도 생길 것이고 또 다른 뉴스라던가, 요새 그 남녀 학생들의 교재 방법이 어떻게 달라진다던가 또 무슨 재미있는 것도 있을 거고, 이런 것을 자꾸 실어줌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될텐데 그렇잖고 무슨 박사논문까지는 아니지만 어려운 어떤 문예비평 이런 걸로 할 적에 저는 신문은 그게 아니다.....


▲李- K대 신문이 그런 식으로 나오죠. 한 페이지를 전부다 그런 식으로.


▲朴- 그건 참 난처해 지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선생이 강의하는 그런 계통의 학생들은 읽을 수가 있지요. 그리고 교정보는 사람이 읽을 거고 그 외 사람들은 별로 흥미없는거란 말이요.(일동 웃음)
신문이란 것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모두 흥미 있는 또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이런 것을 실어야 하는데 불교도 마찬가지죠. 불교신문도 불교의 어려운 이론을 싣고 하는데 그건 불교 잡지도 있을 거구 조금 더 가면 책이 나올 것 아닙니까? 신문은 어려운 것을 쉽게 풀이해 주어야지요.


▲柳- 진통이 바로 그겁니다. 원불교신문을 창간해야겠는데- 한국의 경우를 대강보고 하는 얘기입니다만- 대체적이듯이 서로 자기 종교의 선전의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상업신문의 차원만 달리하는 그런 방향으로 내닫는데 그것의 하나가 플러스되기 위해서 된다면 이것 차라리 않는 것이 어떤가 이런 생각입니다. 저 자신도….


▲李- 그럴 필요도 있긴 있겠죠. 그런데 난 원불교신문을 일간으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柳- 그건 뭐 그럴 것 같군요.


▲李- 일간으로 할 필요는 없는데 지금 다른 종교신문이 제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까 기대하는게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원불교가 잘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인데 주간으로 하는 경 ( ?? )


▲趙- 하시죠.


▲李- 암만 얘기 해 봐도 사람이 없으니까 안됩니다. 지금 불교신문이 봉착하고 있는 고민이 그건데요. 기자가 없어요.


▲朴- 훈련된 기자가 없다는 얘기죠.


▲李- 예. 그래가지고는 이런 방향에서 취재해 보아라 이렇게 기획을 하라고 해도 뭐가 안나와요.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할 수도 없고…


▲趙- 기자가 없다는 것은 주로 이유가 무엇입니까?


▲柳- 세련된 문제 착안이라던가….


▲李- 기자가 없다는 것은 불교신문은 다른 신문하고 달라요.  아무리 똑똑해도 뭐 불교를 알아야지요. 불교를 모르니까 뭐를 어떻게 취재해야 할지 모르지요.


▲趙- 유능한 기자를 채용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도 그것이 어려서부터 불교 교육을 받아 가지고 정신지식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니까….


▲李- 그러니까 그게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원불교에서 뭐라고 합니까 똑똑히 알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만, 기자들이 정말 보살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사건 하나를 볼 때 나는 이러한 각도에서 다룬다 하는 저의 세계관이 서 있어야 될텐데 그게 없으니까 기사를 써도 뼉다귀만 써요. 그러니까 표제만 커다랗게 달아 놓고 읽어보면 아무 것도 없지요.  따라서 그런 사람들을 양성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趙- 지금 각 종단에서 자기 나름의 각 기관지, 기관지라고 해야 되겠지요. 지금 우리 나라의 종교신문은….


▲李- 대개 기관지인 것 같습니다 만은….


▲趙- 그렇다면 그 기관지를 내가지고 얼마나 큰 포교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 실질적으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좀….


▲李- 네. 그것은 굉장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못난 신문이라도 저희 군중들이 일선에서 제일 필요로 한 것이 신문이래요. 소식을 전해주고 또 활자라면 뭐든지 고마우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몇번씩 되풀이해서 읽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그 신문보내기 운동을 전개해서 일선이랄지 교도소 계통에도 보내는데 그것을 보고 回心해서 종교를 찾는 경우가 실제로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정말 사명이 중대하다고 저는 느낍니다.
▲趙- 그런 면에서는 그 종단에서 나오는 잡지보다는 신문이 더 효과가 크겠지요.


▲李- 신문은 손쉽게 살 수 있잖습니까? 잡지라는건 손쉽게 읽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같은 해설 기사라도, 알아듣게 교훈적인거라 하더래도 딱딱한 논설로 쓰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제가 같은 교재를 가지고 강의를 하는데 열번쯤 하면 열한번째는 좀 괜찮은게 나와요. 그 동안 이해가 생기고 그 이해를 거기에다 쓸어 넣을 수가 있어요. 문장뿐만 아니라…이렇게 되어야 산 것이 되는데 그것이 문제지요. 그러니까  베테랑급이 이걸 해야 될까?


▲柳- 예. 어떻습니까? 일반 신문에 있어서 특히 동아일보 하면 굉장히 인기가 있는데 종교를 가진 기자의 냄새랄지 또는 일반신문이 종교의 폐지를 차지할 적에 비중 같은 것은….


▲朴- 아까 잠깐 말씀드리다 말았지만 우리가 - 사이비 종교는 별문제입니다만-종교를 파헤친다던가 또는  어떤 불명예스러운 것, 이런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게 우리 방침입니다. 신문 윤리 요강에도 명시해 놓았습니다. 사람들도 좋아서, 신용에 의해서, 「컨빅숀(Co  ?  )에 의해서 하나가 되야겠죠. 그러나 종단간의 분쟁, 가령 비구승이다 대처승이다 하고 싸우는데 무섭습니다.(일동 웃음)
이런 어떤 사회문제화 된 건 도리없지만 되도록 각 종파끼리 또는 기독교와 불교, 전연 이질적인 종교끼리라도 화해하게 서로 공경하는데, 우리가 조금도 저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정도니까 어느 면에서는 우리가 종교에 대해서는 퍽 소극적이지요.
▲柳- 그렇겠구만요.


▲李- 그럴 수밖에 없을거요.


▲朴- 그런데 그것이 한계점일거요. 그래서 일반신문은 종교를 내세우지 않는데, 가령 원불교신문 같은 경우는 종교계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자기 나름의 「포지숀」이 서야될 줄 압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이렇게 밀고 나가는 거다 이거는 이렇게 지지하는거다 동아일보도 듣기에는 조금은 그런게 있다고 합니다. 어느 문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하고 뭐….


▲朴- 비구승 말이요?(웃음)


▲李- 예. 뭐 그랬다고 합니다. 그저 것이 서지 않으면 교화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졸렬하면 얻어 맞을 수도 있는 것을 각오하고 해야겠죠.


▲朴- 그저 목적만 좋다고 해서 한다면….


▲趙- 오늘 시간 너무 많이 빼앗았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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