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시대 구원의 책임을 맡은 소태산의 운명과 제자들의 기도가 하늘의 징표를 받게 된다. 소태산은 신앙과 수행에서 철저히 자취를 없애 버렸다. 그런데 왜 이날을 우리는 중요한 경축일로 기념하고 있을까. 소태산은 이적과 신기한 자취를 구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그러나 서품 14장은 아홉 선진님들이 인류 구원을 다짐하는 목숨을 건 기도와 지극한 서원이 담긴 기도문에 혈인으로 도장이 찍히는 사건을 보게 된다. 그리고 법명을 내려주는 유래를 알 수 있는 장이다. 

우리는 종종 종교집단의 집단 자살사건을 접한다. 가장 대규모 사건은 1978년 11월18일,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 타운에서 900여 명의 종교 신도들이 집단 자살하는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은 종교적 신념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비극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럼 소태산이 제자들에게 죽음을 요구한 기도는 과연 안전했던 걸까.

소태산은 제자들의 기도가 부족하여 하늘의 뜻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단언한다. "진정 인류 세계를 위한다면 죽어서라도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라. 여한이 없겠는가?" 9인 단원은 모두 희생하기로 했다. 그리고 8월21일을 최후 희생일로 정한다.

여기서 소태산의 의도를 더 살펴보자. 8월11일은 9인 단원의 백일기도의 정성을 점검하고 사무여한(死無餘恨)을 묻는 날이다. 또한 9인 단원이 죽음을 결심한 서원을 올린 날이다. 왜 이런 과정을 거쳤을까.

소태산이 경계한 것은 사심을 벗어나 철저한 공심으로 살아야 하는 부처의 길을 안내한 것이다.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가 안정을 얻고 행복해지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 인류와 세계를 위한 정성과 서원이어야만 만날 수 있는 위력을 체험하게 한 것이다.

또한 법신불을 모시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훈련이었다. 법신불과 하나되어 백지혈인의 이적으로 징표를 받고 죽음을 면했으니, 새 생명을 받게 된 부활이요, 정신개벽 운동의 바탕이 된 것이다. 

소태산은 백지혈인의 징표를 받은 제자들을 칭찬하며 개인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공인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당부한다. 법명은 부처의 서원에 동참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공명(公明)이다. 중생의 집에서 부처의 집으로 문패를 바꾸어 거는 날이다.

개인의 안위와 행복만이 아니라 전체의 행복을 책임지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또한 법인성사의 거룩한 정신을 살려내는 우리의 몫은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성자로 변화하겠다는 서원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일생을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책임지고 목숨을 걸어보겠다는 서원과 다짐은 이미 우리가 법명을 받은 날 시작됐다.

목숨을 끊어 부활을 어찌 장담하겠는가! 죽을 각오로 세상을 위해 살아내고, 뜻을 지속해야 하는 일이 부처의 길이다. 소태산은 각자의 마음에 하늘을 감동시킬 혼이 있음을 살려내, 양계의 징표로써 법호와 법명을 주는 것으로 성자로 부활시켰다. 헛되이 목숨을 버려 기적을 일으키려고 했던 위험한 의식이 결코 아니었다.

이제 법명을 받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신부활, 도덕부활, 세계부활이 되도록 기도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법인정신을 이어보자.

/와룡산수련원

[2017년 12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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