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여성 십대 제자 가운데 누구보다도 자력양성의 실천과 모범을 보여준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 소태산의 부인이자 권장부 1호이기도 했던 그의 생애와 업적을 원불교사상연구원 정현오 교무가 발표했다.

십타원은 1890년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홍곡리 장기촌에서 부친 양하련과 모친 박현제화의 사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상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나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외려 큰 인연으로 이어진다. 소태산의 모친은 대를 이을 며느리는 가난한 집안에서 골라야 한다고 생각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태산 부친인 박성삼은 지주를 대리해 소작권을 관리하던 마름(舍音)으로 집안은 비교적 여유로워 "시집올 때 대청에 엽전을 쌓아놓고 살았다"고 십타원이 회상했을 정도다.

하지만 소태산은 큰 공부한다고 외부 출입이 잦았다. 게다가 험상궂은 거지를 데려와 도인이라며 갖은 수발과 응접에 온갖 정성을 다한다. 남편의 구도일념으로 허망한 일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시아버지였던 박성삼은 셋째아들이 가사를 불고한 구도에 화병으로 열반하면서 가사의 책임은 고스란히 대사모의 몫이 된다.

그러나 소태산의 구도일념은 해가 갈수록 더했고, 나중에는 부스럼병까지 걸려 폐인이 되어갔다. 십타원은 고된 하루를 보내고 난 후 한밤중이면 후미진 산골짜기 개암골 기도터에 정화를 떠놓고 사방으로 아홉 자리씩 절을 하고 3년간이나 빌었다.

십타원의 정성 때문일까. 소태산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소태산 대각 이후부터는 부부라기보다는 사제지간이 더 가까웠다. 십타원은 "남편이 아플 때에는 허물없이 대하기가 수월했는데, 병이 낫고부터는 내외간이라기보다 오히려 선생으로 모시는 입장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소태산이 회상 초기 방언공사를 할 때 부인을 살살 달래어 집은 물론, 밭이며 살림살이 등을 다 팔아 비용을 만들고 나중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십타원은 사가일과 함께 총부 공동작업도 빠지지 않고 참여해 많은 양의 작업을 해냈다. 어느 날 소태산이 수행원과 지나가다 "폭양 아래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내가 원망스럽지 않는가" 하고 물으니, 십타원은 "그렇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대중들은 십타원 대사모가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자 소태산은 "저것은 하운이 생애의 보람이요 복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훗날 공타원 조전권 선진은 "어느 날 조실에 들어갔는데 대종사님은 회보를 보며 홀로 눈물짓다가 감추셨다. 회보에는 부인의 곤궁한 사가생활이 그려져 있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십타원은 사가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소태산의 뜻을 받들어 자력양성을 표준삼았다. "(중략) 내가 공사에 큰 보조는 하지 못할지언정 공사에 전력하시는 종사님에게 추호라도 방해될 일을 하여서야 되겠는가. 또는 내가 공중의 물건을 먹을 만한 자격과 가치가 없이 먹는 것은 이 이상 큰 죄가 없는 일이니 나는 종사님의 공사 하시는대로 방해되지 안케하고 또는 죄도 짓지 아니하고 차라리 삼순 구식을 할지라도 오즉 내 힘으로 내 생활을 하여 가는 것이 이 이상 행복되고 양심상 편안한 일이 없네."

대사모 댁을 찾아간 시자 김형오는 대사모를 잘 모시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안타까움이 있었으나 대사모의 공사 분명한 의지에 감명을 받아 돌아왔음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십타원은 남편에 의지하기는커녕 남편 구도 뒷바라지와 자녀양육 등 사가 일을 전담했다. 또 회상창립에 혈성을 다해 내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태산의 철저한 공사정신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일동일정이 공중사에 누를 끼칠까 염려해 대중 앞에 드러나기보다 숨은 공도자 역할에 임했다. 제1회 창립유공인으로 등재된 십타원은 원기58년 1월 향년 83세에 열반한다.

대산종사는 십타원 대사모 발인식에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반드시 숨은 것을 바탕함과 같이 드러난 성자의 배후에는 반드시 숨은 무명의 성자가 계시다"며 회상창립의 숨은 성자로 높이 받들었다.

[2017년 12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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