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소외라는 말로 특징지을 수 있다. 많은 현철들은 이 소외야말로 문명이 가져다 준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마르크스이다.

그는 〈경제철학수고〉에서 자본주의사회 하에서 인간은 네 가지 소외를 겪는다고 한다. 그것은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 그 자체로부터의 소외, 자연과 사회로부터의 인간소외,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소외이다. 이처럼 경제체제에서 소외문제를 제시한 마르크스와는 달리 프랑크푸르트학파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합리적이고 기계적인 과학기술의 기능주의에 지배당한 현대인간은 자유와 독립성을 박탈당해 더욱 고립되고 소외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한다. 즉 내면적 결단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과학의 지배와 함께 욕망과 사고방식까지 조작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 아래, 현실 초월의 근원적 능력마저 상실하고, 밖에서 조정하는 대로 의욕하고 사고하며 행동하는 존재를 말한다. 하이데거 또한 기술문명에 중독된 인간이 대량생산과 대중매체의 개념 아래 대중이라고 하는 익명성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거나,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해 유행을 따르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는 그의 말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돌아가야 할 고향을 상실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불안하다. 불안하기 때문에 무언가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공허한 자아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소유하고 소비한다.

자신의 환상인 욕망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예의염치나 공정한 법칙은 없다. 자신의 모든 감각, 모든 사회적 능력을 발휘하여 그 욕심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이루지 못 할 때에는 자신을 더 큰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가패신망, 염세, 신경쇠약, 마침내 자살에 이르기까지 한다. 문명은 발전하는데 왜 병원과 교도소를 점점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법은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으며, 새로운 전쟁무기는 더욱 파괴적으로 나아가는가. 교육은 청소년들에게 조화와 협동, 공존과 상생을 가르치지만 왜 경쟁과 열패, 상극과 투쟁 의식으로 가는 길을 막지 못하는가. 고등교육을 받아도 수많은 현대인들은 술, 담배, 각종 약물로 자신을 더 센 자극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묻는다. "왜 나는 이러한 운명에 처하는가"라고.

문제는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 데에서 온다. 즉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소비와 쾌락의 무한정한 추구는 이러한 극단적인 현상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주변의 존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인이라는 의식을 상실한 것이다. 되돌아갈 용기를 잃고, 자기를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고자 하지만 세계에 그러한 공간은 없다. 자신 안의 낙원을 떠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인 자아는 부풀려지고 존재의 참 모습은 점점 희미해진다. 불성의 현현인 살아 있음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지 못하는 그는 영원히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는 멈추고 자각할 때다. 진정한 자유의 근원인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은 바로 나의 발아래에 있다. 자신의 방문 앞에 써 붙여 놓을 일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원광대학교

[2017년 12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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