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근본적으로 불교와 원불교의 지혜에 대한 의미 차이는 없다. 그것은 수행으로 마음의 지혜를 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팔리어의 빤냐(panna) 즉 지혜는 모든 현상의 이치를 명확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을 통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의 프라즈냐(prajna) 또한 모든 관념과 차별을 넘어선 무분별의 지혜를 말한다.
<법구경>에서는 "실로 마음이 통일되면 지혜가 생긴다. 마음이 통일되지 않으면 지혜가 소멸한다"고 하며 지혜에 이르는 길은 마음의 통일이라고 한다. 또한 석존은 지혜와 선정이 서로 의지하고 있으며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설한다. 물론 초기불교에서의 지혜는 어디까지나 집중과 관찰 수행을 통해 탐진치를 여의고 마침내 윤회를 벗어나는 것에 목표가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연기공관사상에 의거 아법이공(我法二空)의 깨달음에 이르는 해탈이 목표가 된다. 그것은 모든 지혜 중 가장 근본 지혜인 일체종지(一體種智)이자 중생 구제를 위해 다양한 방편을 낳는 무량한 지혜가 된다.  

원불교의 사리연구는 이러한 대승의 지혜를 계승하고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현상과 본질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완전한 길을 말한다. 목표 또한 무명으로부터 벗어나 실상을 통찰하고 해탈하는 것이다. 사리연구는 동아시아의 언어를 받아들여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현상과 본체를 의미하는 사리(事理) 연마에 기반한다. 이원화된 인간의 인식구조를 활용하고 있다. 유교나 불교에서도 진리를 파악해 들어가는 기본구조이다.

유교의 사리(事理)와 체용(體用), 불교 특히 사사무애법계를 최고경지로 보는 화엄의 법계연기 등이 그것이다. 이(理)의 대소유무는 우주 인식의 주체인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사(事) 또한 궁극적으로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시비이해는 삶의 현실에서 정의와 불의, 선과 악, 고와 낙 등의 판단을 통해 이 세계를 바르게 이끌어가는 지혜의 길을 포함한다. 생활불교로서의 지혜인 것이다.     

지혜를 얻는 방법은 석존이 설하셨듯이 문사수(聞思修)가 기본이다. 선지식의 법문을 많이 듣고, 깊이 생각하며, 실천하는 곳에서 지혜가 발현된다. 원불교 또한 소태산이 구도과정에서 그러했듯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의문을 진리로 파악하는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다. 최고의 길은 성품의 이치인 성리를 계발하고, 솟아나는 지혜를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여 더욱 튼튼한 지혜로 단련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길에 참고가 되는 방법은 주지하다시피 지혜를 얻는 길인 세 가지 반야(般若)이다. 반야는 빤냐를 발음대로 표기한 음사어이다.
관조반야, 문자반야, 실상반야이다. 반야사상에서 확립된 세 반야야말로 현재까지 우리가 말하는 지혜를 가장 잘 구분해서 드러내주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반야가 있지만, 세 반야는 마음과 경전과 현실을 지혜의 근본이자 살아 움직이는 지혜로 본다. 세계의 모든 지식과 학문 또한 이 범주에 있다. 이러한 반야가 삼학의 하나인 사리연구에도 그대로 수용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의두요목, 경전연마, 무시선과 불공법 등 수행편의 모든 가르침은 반야와 사리연구의 길인 것이다.    

[제1873호/2018년1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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