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박성은 교무] 초등학교 6학년 때, 도시로 학교를 간 큰 오빠의 인연으로 원불교가 우리 고향에 들어오는 계기가 돼 가족, 이웃들까지 교당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무엇이 우리를 교당으로 움직이게 했을까?  

원불교의 출현은 지금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태산은 대각 후 사회의 문제와 시대에 대한 진단을 먼저 했다. 그리고 시대와 환경에 맞는 처방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각 후 불법에 대한 위대함과 석가모니를 성중성(聖中聖)으로 칭했다. 하지만 소태산은 불교에 예속되거나 불상을 모시지 않고 독자적인 횡보를 선택한다. 당시의 엄청난 불교교리와 제도에 대한 전파를 목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품 16장에서는 당시 소태산의 눈에 비친 조선불교의 모습을 묘사한다. 유교의 세력에 밀려 산중으로 들어가서 민중과 유리된 모습을 지적하며 혁신에 대한 논점을 드러내고 있다. 소태산이 말하는 불교혁신운동의 초점은 세상의 문제를 불법으로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처방이었다. 소수 출가자의 입장을 비판하거나 밖에서 바라보는 승단의 모습만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었다. 미신과 허위에 빠져있는 민중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현실참여와 민중지향의 개혁이 핵심이다. 수많은 종교 중 원불교 하나를 더 추가 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진단과 처방이 필요했기 때문에 원불교가 출현한 것이다.  

원불교의 개혁은 신앙의 변화다. 법당에는 불상이 없고 일원상을 모시고 있다. 신앙 행위는 법당에서만 이루어지는 특별의식이 아니라 그 대상과 장소에 맞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불공은 삶 속에서 관계와 구체적인 변화를 이끄는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이 소태산의 관점이다.

그런데 원불교는 신앙이 약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게 된다. 어딘가에 매달리고 의지해서 내 삶의 결정권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은 것일까? 그럴 의도가 아니라면 다시 생각해 보라. 원불교의 신앙은 철저히 자신을 부처로 모시는 믿음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존재도 부처로 보고, 모시는 눈이 생기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가 가는 곳마다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니 얼마나 큰 법당을 차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여기저기 교당이 많이 세워지고, 교도가 늘어나는 것이 원불교의 성공은 아니다.  또한 교도가 줄어들고 교당이 사라지는 것이 원불교의 실패도 아니다. 소태산의 바람은 불법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다. 불법을 말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불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드러나고 큰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되었음을 감지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수행자임을 자청해서 대접을 바란다거나, 원리와 원칙을 앞세워 타인의 수행을 평가하기에 바쁜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마음공부는 이론이 아니다. 무엇이 맞고 틀리냐만 비판하다가 공부는 누가 하는가? 신앙과 수행은 원만한 인격과 은혜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힘이 돼야 한다. 원불교는 이제 103살이 됐다. 소태산이 주장한 원불교는 안녕한가. 원불교를 말하지 말고 '원불교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이 우리의 대안이다.  

[2018년 1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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