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 이여원 기자]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스콧 니어링,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아나키즘을 비롯, 생태사회주의 입장을 견지한 머레이 북친, 저술가이자 진보적 교수 노엄 촘스키, 그리고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해외항일투쟁과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했던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신채호, 민권운동가이자 현실모순을 몸으로 부딪히며 살았던 인물 함석헌.  이들 아나키스트의 가슴을 지닌 사람, 김대식 교수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소개한다.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학자들의 왜곡된 번역어라고 봅니다. 인간의 절대적 자유주의자, 자본주의 비판가,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실험해 보며 사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어떨까요."  그런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그는 폴더폰을 지극히 본질에 맞게 사용하고, 아무리 높은 곳도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으로 걸어다니며, 하루 한 끼 식사로 음식의 절대 가치를 실천하는, 다른 표현으로 '아날로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기독교미래교육연구소 부소장인 그는 종교학과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강단에서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그와의 대화는 종교와 종교적 삶의 의미에서부터 시작됐다.
김대식 교수 /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기독교미래교육연구소 부소장

인간의 존재와 종교적 사유, 삶의 방식을 이야기했던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다. 
"말보다는 침묵, 목소리보다는 행동으로 종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종교(religion)란 라틴어의 relegere(다시 읽는다), 혹은 religare(다시 묶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religare는 타락한 인간과 신을 '다시 잇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좀 더 외연을 확장시켜 보면 종교, 즉 religare란 신과 인간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측면이 있고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맺어주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 결국 종교에서 말하는 신념대로 산다는 것은, 인간이 서로 돕고 이해하면서 연대하는 삶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얘기다.

"종교는 결국 하나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종교라는 것도 타이틀이나 변화 가능한 개념에 불과하죠. 모두가 인간입니다. 유한자이고. 다만 우리가 종교라고 하는 특정한 어떤 정신이나 깨우침을 위한 삶에 토대를 두고 산다고 할 때, 궁극적으로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가치나 신념은 거의 대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월과 열등을 따진다면, 종교 어디에 우월과 열등이 있을까요. 다른 종교를 알고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필요한 것이지요."

종교는 '다름의 현존이다'는 그의 명확성에 따르면 종교는 다름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가진 정보를 통해 인식하는 종교, 세계, 인간, 사물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무명)을 벗겨내는 것.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로 보이고, 예수의 눈으로 보면 예수로 보이고, 알라의 눈으로 보면 알라로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인의 참된 삶의 모습이요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가 반문한다.

종교는 끊임없이 저항해야 하는 것

"종교는 관계이고 연결입니다. 그리고 깨우침이지요. 종교의 문제는 지금 이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겁니다. 타자와의 관계를 환대나 사랑, 종교적 가르침에 의한 무한한 열림과 연결로 보지 않고 정치적, 이익적(자본적), 권력적 관계로만 보고 있습니다." 종교를 고착화된 무엇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체제, 제도, 교리, 조직 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종교가 종교적 모험을 하기 싫어하는 것이라고 그는 직언한다.

"종교적 모험이란 창교자의 뜻과 깨달음에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고 노출시켜서 자신의 영성과 정신을 실험하고 실증하는 것입니다. 머물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불거진 개신교의 대형교회 세습 문제도 영원히 변화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도자가 그렇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종교적 정신과도 맞지 않는 것이죠. 예수는 사적 소유를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생성이란, 나의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 내가 아닌 다른 것 되기.' 그는 질 들뢰즈의 말을 인용했다. 종교인, 특히 지도자는 다른 것 되기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야 한다는 일갈이다.

종교적 행복의 근원자리를 묻다

왜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종교를 갖고 있다는 자체가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묻는 것은 아니다. '왜'라는 이유를 묻기 전에 '왜'가 처해 있는 근본자리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는 '종교인은 종교를 왜 배워야 하는가'와도 맥이 닿아 있을 터. 

이 지점에서 그는, 지금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교를 통해서 추구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성찰해 보기를 요청한다. 결국 우리가 행복하려면 종교는 종교의 근본자리를, 사람은자신의 근본자리를 잃지 않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여러 각도에서 차분하게 때론 매섭게 강조했다. 

인간의 존재와 종교적 사유, 삶의 방식을 이야기했던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다. "말보다는 침묵, 목소리보다는 행동으로 종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2018년 1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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