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철 교도 / 부산교당

 

공공장소 사용할 때 나는 주인인가 객인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인돼야

[원불교신문=오도철 교도] 주인의 삶을 사는가, 객의 삶을 사는가. 그것이 물질이 되었든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든 어떤 누구고 객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당 일요예회 설법시간에 대종사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대종사가 서울 순방을 할 때에는 자주 기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기차의 화장실은 지금과 같이 깔끔하고 깨끗하게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루는 대종사가 화장실을 다녀온 뒤, 서울에 도착했을 때 동행한 제자에게 본인의 손수건을 주었다. 일행이 살펴보니 화장실의 대변이었다. 

대종사는 더러운 화장실을 직접 청소하다가 화장지가 부족하자 본인의 손수건으로 청소를 했던 것이다. 그 순간 대종사에게 기차의 더러운 화장실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 대중이 다 같이 쓰는 공공장소가 아닌 대종사의 자택 화장실과 다름없이 여겼을 것이다. 비록 대중이 쓰는 공중화장실일지라도 당시 그 화장실의 주인은 대종사였던 것이다. 

이 법문을 전해 듣고 참 많이 부끄러웠다. 나는 평소에 더럽거나 관리가 되지 않는 공공시설을 보면 주인의식 없이 더럽혀 놓은 사람을 욕하기만 했다. 내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행동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대종사처럼 행동하기는 힘들지만 다른 이를 욕하기 전에 우선 내 스스로가 공공시설에 대한 마인드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를 살폈다. 

하루는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갔을 때다. 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며 난 생각한다. 저 사람은 이 카페의 주인인가 종업원인가. 정말 주인이든 종업원이든 그 순간 내 마음속에는 저 사람은 이 카페의 주인일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본 적이 많다. 그 사람이 이 카페의 실소유주가 아니고, 이 건물의 주인이 아니더라도 주인의 마음으로 친절한 서비스를 베풀면 이미 진정한 주인인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이 나로 인해 잘되고 잘 풀리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일을 하는 그 순간 이미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나에게 있어서 그는 그곳의 주인이었다.   

나는 직장인이다. 일반적인 다른 직장인과 같이 많은 연봉을 받고 싶고, 일도 내가 하는 일이 모두모두 잘 풀렸으면 한다. 그러면 나는 다니는 회사에서 주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가끔 나에게 물어본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면 여러 가지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 일이 잘 풀려서 칭찬을 듣기고 하고 일이 풀리지 않아 곤란한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때로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로 인해 칭찬을 받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일이 잘 풀리거나 익숙한 일을 할 때면 하나라도 더 보고 꼼꼼하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주어진 일에 있어서 의무를 가지고 이 일로 발전하는 회사를 생각해 보고 더욱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한다. 

그때 난 이 회사의 직원이지만 오너와 같은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된다. 반면에 일이 잘 풀리지 않고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며 남들이 다 하기 싫어하는 일은 피하고 싶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피하기도 한다. 그때 난 이 회사의 직원이자 종인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인의 삶으로 살아가는가, 객의 삶으로 살아가는가. 나는 과연 내 삶의 순간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는지 살필 일이다. 그 노력 이전에 대종사와 같이,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과 같이 처하는 곳마다 나로 인해 더욱 발전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정산종사법어〉 공도편 15장에 "공부나 사업이나 주인의 심경으로 하는 이가 있고 머슴의 심경으로 하는 이가 있나니… 주인은 알뜰하고 상이 없기 때문에 알뜰하고 국한 없는 공이 돌아오나니, 주인의 공부와 주인의 사업을 꾸준히 계속하면 마침내 시방 세계가 오가의 소유인 지경에 이르게 되며, 이러한 인물들이 우리 회상의 큰 주인이 되나니라"고 한 법문의 뜻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2018년 1월 19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