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새로운 차나 비행기나 선박일수록 최신의 기술문명이 집약돼 있다. 사람을 실어 나르되 가장 안전하고 편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이 아니면 누가 요즘 고대사회의 마차나 나룻배를 사겠는가. 최첨단의 기계기술, 전자기기, 디자인 등 과학은 이러한 점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 왔다. 이 인간의 지혜를 삶에 편리하게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현대종교일수록 인류의 정신세계나 삶의 양식을 더욱 행복하게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오래된 종교라고 할지라도 변화된 인간의 삶에 더욱 밀착하여 자신의 교의를 새롭게 해석하고 보완해야 한다. 종교연구자가 아니면 누가 현대사회에 여전히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에 관심이 있겠는가. 

원불교 또한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불법을 펼치는 종교로서 이전과는 차이점이 있다. 바로 가치창조의 종교라는 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늘(천), 신, 자연, 도 등으로 말하는 진리 혹은 공리(公理)를 인간이 활용하여 이 사회를 옳고 바르게 이끌어 가자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성현들은 사회를 이끌 새 법도를 제정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정의롭고 공평하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깨달음과 자비의 힘을 발휘하는 분들이다. 

소위 천권을 잡아서 자유자재로 쓰는 분들인 것이다. 이제 우리 평범한 인간도 하늘의 진리를 인류의 앞길을 밝히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 종교를 믿는 이유 또한 그 길을 걷자는 것이다. 사리연구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계몽이 필요했기 때문에 많은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에 수많은 희생과 고통이 있었다. 왕권과 민권, 혁명과 반동, 수구와 진보, 좌와 우, 경제의 남북과 정치의 동서 등등.

정약용은 아들 학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천하에는 두 가지 거울이 있는데, 시비의 거울과 이해의 거울이 있다고 한다. 이 거울이 합쳐 네 가지 등급이 있다고 한다. 옳으면서도 이로운 것(是而利), 옳지만 해를 보는 것(是而害), 옳지 않지만 득이 되는 것(非而利), 옳지도 않으면서 손해가 되는 것(非而害)이다. 불보살의 삶은 앞의 두 세계에, 무명 중생의 삶은 뒤의 두 세계에 속한다. 성인과 소인은 엄연히 다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고 한다. 맹자 또한 이를 계승하여 사필귀정을 명확히 했다. 그는 의를 좇는 자는 의도 얻고 이도 얻지만, 이만을 좇는 자는 의도 잃고 이도 잃는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소태산 대종사가 인도정의(人道正義)를 설한 것도 같은 뜻이다. 정의는 죽기로써 실천하라고 가르친 것은 시(是)와 이(利)가 대립된 것이 아니고 일치하기 때문이다. 옳으면 '반드시' 이롭다.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고 수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소유무의 이치를 깨달아 시비이해를 현실에서 확립하는 것이다. 종교의 여러 가치 가운데에 이사병행의 가치야말로 모든 주관적 가치를 넘어 인류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최상의 객관적 가치이다. 

사리연구의 궁극의 목표는 영과 육, 종교와 정치, 물질과 정신, 공부와 사업 등의 이사(理事)의 세계를 가치창조를 통해 하나로 묶어내는 일이다. 이 점이 현대종교로서 원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원광대학교

[2018년 1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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